프랑크푸르트학파가 한자리에 모였다. 호르크하이머(왼쪽)와 악수하는 아도르노. 오른쪽 뒤에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이는 하버마스. 뒷줄 왼쪽은 지그프리트 란츠후트. 1964년 4월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그들의 동료인 제레미 샤피로가 찍은 사진.
20세기 독일 철학사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만큼 미국의 현대 대중사회를 집요하게 분석한 지식인 집단도 드물다.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르 아도르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등은 나치 집권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역설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에게 피난처와 연구의 자유를 제공한 미국에서 미국 자본주의와 대중문화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는 이론을 만들어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특히 주목한 것은 미국의 ‘문화산업’이었다. 영화, 라디오, 대중음악, 광고와 소비문화가 인간에게 엄청난 선택의 자유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비슷한 취향과 욕망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대중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상품과 가치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데 그친다는 것이 이들의 비판이었다. 아도르노에게 할리우드는 단순한 오락산업이 아니었다. 현대 자본주의가 사람의 의식과 욕망까지 상품화하는 거대한 시스템이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미국 비판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아도르노 등이 1950년에 내놓은 ‘권위주의적 성격’은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에서도 권위주의적 지도자를 추종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가족관계와 사회적 불안, 편견과 정치적 태도를 분석하여 파시즘을 받아들이기 쉬운 인간형을 찾아내려 했다. 이후 이 이론은 미국 보수주의와 우파 대중운동을 분석하는 데 반복적으로 사용되었고, 오늘날 트럼프와 MAGA를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으로 해석하는 논의에서도 그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의 등장을 미국 사회에 잠복해 있던 파시즘이나 권위주의적 욕망의 표출로만 설명하면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놓치게 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백악관]
공장이 문을 닫고 제조업 일자리가 해외로 빠져나갔으며 세계화의 이익은 사회 전체에 균등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국경과 불법이민에 대한 불안도 커졌고 워싱턴 정치 엘리트와 주류 언론에 대한 불신도 누적됐다.
이런 사람들을 모두 ‘권위주의적 성격’으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 편리하다. 정치적 불만의 원인을 유권자의 심리에서 찾아버리면 정치 엘리트는 자신의 실패를 반성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던진 질문은 오히려 현실적이었다. 왜 미국 노동자가 희생하면서까지 자유무역을 유지해야 하는가? 왜 미국의 국경을 미국 정부가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가? 왜 미국 국민의 세금으로 동맹국의 안보 부담까지 과도하게 떠안아야 하는가?
왜 중국의 산업적 부상을 지원하는 경제질서를 미국이 계속 유지해야 하는가? 트럼프의 답변과 정책 수단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가 제기한 문제 자체까지 무지한 대중의 분노나 권위주의적 충동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이 점에서 트럼프는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상정했던 수동적 대중이라는 그림을 흔들어 놓는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게 미국 대중은 문화산업이 공급하는 상품과 이미지를 소비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기존 질서에 순응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트럼프를 선택한 상당수 유권자는 오히려 기존 질서에 반기를 들었다. 주류 언론이 트럼프를 비판할수록 지지자들은 언론을 의심했고, 워싱턴 정치권이 그를 위험한 인물이라고 규정할수록 기존 정치체제 자체를 의심했다.
물론 여기에는 흥미로운 역설이 있다. 트럼프 자신이 TV 리얼리티쇼를 통해 전국적인 유명인이 된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이 트럼프를 설명하는 데 일정한 힘을 갖는다.
그러나 트럼프는 문화산업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기존 문화권력에 대한 반란의 지도자가 되었다. 주류 언론과 할리우드, 대학과 지식인 사회가 오랫동안 행사해 온 문화적 권위에 상당수 미국인이 더 이상 자동적으로 복종하지 않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약점이 드러난다. 그들은 대중을 지나치게 의심했다. 엘리트가 만든 문화에 순응하는 대중도 의심했고 그 문화에 반항하는 대중에게서도 권위주의와 파시즘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미국 대중은 트럼프의 연설에 열광함으로 기성 언론이나 정치권을 향한 불만을 공유한다. [사진=AFP]
그렇다면 평범한 시민이 기존 질서에 저항하면서도 민주주의적일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엘리트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 유권자는 언제까지 계몽되지 못한 대중으로 취급되어야 하는가? 민주주의에서 시민은 지식인의 교육 대상만이 아니다. 투표를 통해 엘리트를 해고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다.
트럼프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의미도 여기에 있다. 그는 미국인에게 새로운 이념을 가르친 철학자가 아니다. 오히려 미국 사회에 오랫동안 존재했던 불만을 정치의 중앙으로 끌어낸 정치인이다. 국경, 제조업, 중국, 자유무역, 동맹의 비용, 정치적 올바름, 워싱턴 관료주의 같은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쟁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방식이 거칠고 발언이 과격하다는 사실과 그가 제기한 문제의 타당성은 별개의 문제다.
특히 트럼프 이후 공화당의 변화는 중요하다. 과거 미국 보수주의가 감세, 규제 완화, 자유무역과 작은 정부를 중심으로 움직였다면 트럼프는 여기에 국경, 제조업, 경제 안보와 국가주권을 결합했다. 그 결과 공화당은 전통적인 기업 엘리트 중심의 보수정당에서 노동 계층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대중정당으로 성격을 바꾸었다. 트럼프주의가 기존 공화당 정치와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여기서 다시 질문할 수 있다. 공장 폐쇄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가 자유무역을 의심하면 권위주의자인가? 불법이민을 통제하라고 요구하면 극우인가? 중국과의 불공정한 경쟁에 대응하라고 요구하면 배타적 민족주의자인가? 주류 언론의 보도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민주주의의 적이 되는가? 그렇게 규정해 버린다면 문제는 대중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정치와 지식인 사회에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다고 트럼프의 모든 정책이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관세가 소비자 가격을 높일 수 있고 보호무역이 보복관세를 부를 수 있다는 비판은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 외교와 동맹에서도 거래적 접근이 장기적인 미국의 전략적 이익과 충돌할 가능성을 따져봐야 한다.
그러나 정책의 성공 여부와 정치적 문제 제기는 구분해야 한다. 트럼프 이전 미국 정치에서 세계화는 거의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으로 취급됐고 자유무역과 생산기지의 해외 이전, 중국 경제의 세계시장 편입은 장기적으로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강했다.
그런데 정말 그랬는가? 세계화의 이익과 비용은 미국 사회에 공평하게 분배되었는가? 뉴욕과 실리콘밸리가 번영하는 동안 러스트벨트의 공장 도시는 어떤 대가를 치렀는가? 중국의 성장이 자유로운 국제질서의 강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얼마나 실현되었는가? 트럼프는 그동안 정치 엘리트들이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이던 문제들을 다시 질문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트럼프가 미국 정치에 남긴 중요한 변화다.
그래서 트럼프를 이해하려면 아도르노를 읽되 아도르노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현대 자본주의가 인간을 어떻게 획일화할 수 있는지를 훌륭하게 설명했다. 문화산업이 여론과 욕망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대한 그들의 통찰은 지금도 살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충분히 신뢰하지 못했던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자유사회의 평범한 시민이 기존 엘리트의 판단을 거부할 능력이다.
트럼프 현상의 핵심을 권위주의에서만 찾는다면 미국 민주주의에서 벌어진 더 큰 변화를 보지 못한다. 트럼프는 미국 민주주의의 붕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른 각도에서 보면 미국 민주주의가 가진 자기 교정 기능에서 나온 정치인이다.
세계화와 탈산업화, 국경 관리와 중국 문제에 대해 기존 정치가 제대로 답하지 못하자 유권자들이 기존 정치 문법을 깨뜨리는 후보를 선택했다. 트럼프의 거친 정치적 스타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를 필요로 했던 미국 사회의 변화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대중이 얼마나 쉽게 조작될 수 있는지를 걱정했다. 그러나 트럼프 시대의 미국은 반대편에서 질문을 던진다. 대중은 정말 그렇게 어리석은가? 대중은 언제까지 엘리트가 정해놓은 정답에 따라 투표해야 하는가?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미국 대중에게서 권위주의의 위험을 발견했다면 트럼프는 미국의 평범한 유권자에게서 기존 질서를 바꿀 정치적 힘을 발견했다.
어쩌면 트럼프 시대가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던지는 가장 곤혹스러운 질문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민주주의를 믿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하는 대중만 믿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싫어하는 선택을 하는 대중의 권리까지 인정하는 것인가? 트럼프를 둘러싼 논쟁은 바로 이 질문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 松山(송산) 정광제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 ‘문학의 세계와 사상’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