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통일교의 정치권 로비 의혹은 애초에 종교의 문제가 아니었다. 교단의 정치자금 제공과 비공식 영향력 행사라는 제도적 취약성의 문제였다. 그러나 대통령이 직접 개입하면서 이 사안은 헌법의 문제로 전환됐다.
대통령의 발언과 대응이 헌법 제20조, 정교분리의 원칙을 호출하면서 논쟁의 초점은 ‘누가 로비했는가’라는 법적인 문제와 함께 ‘헌법을 어떻게 읽고 있는가’라는 대통령의 인식 문제로 확장됐다.
법적인 문제는 수사를 통해 밝혀지겠지만 대통령의 법 인식 문제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대통령이 언급한 헌법 제20조 제2항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이 조항은 종교를 관리하거나 압박하라는 규정이 아니다. 국가 권력이 특정 종교와 결합하지 말라는 자기 구속의 원칙이며,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권력을 규제하는 조항이다. 정교분리는 종교를 향한 규제가 아니라, 권력에 대한 제한이다.
이 지점에 대한 이해의 열쇠는 몽테스키외의 법철학에 있다.
18세기의 계몽사상가 샤를-루이 드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법을 단순한 명령이나 문장의 집합으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법이란 사회 구조 속에서의 권력과 자유의 필연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법을 해석할 때 언제나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이 해석은 권력을 제한하는가, 아니면 확장하는가.” 몽테스키외에게 법의 정신이란 권력을 설득하기 위한 언어가 아니라, 권력을 멈추게 하기 위한 장치였다.
이 기준에서 보면 최근 정교분리 논란에서 드러난 이재명 대통령의 대응은 전형적인 헌법 오독의 사례다. 정교분리 원칙의 근간은 권력이 스스로 종교와 거리를 두게 하려는 것인데, 이 대통령의 발언은 특정 종교를 향해 선을 긋고 자제를 강요하는 압박의 언어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헌법 조문이 공론의 기준으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 권력의 메시지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 대통령이 정교분리를 언급한 방식은 토론이나 헌법 해석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정치적 형식은 논의였을지 모르나, 권력의 위치에서 언급된 내용은 사실상 경고에 가깝다. 헌법 조항을 들고 특정 집단을 겨냥하는 순간, 그것은 해석이 아니라 권력 행사로 비치기 때문이다. 정교분리를 명분으로 종교를 억압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그것은 정교분리가 아니라 국가의 종교 개입이다.
이러한 해석 태도는 12·3 계엄을 둘러싼 ‘내란’ 규정에서도 반복된다. 내란은 단순한 충돌이나 혼란의 결과로 판단되는 개념이 아니다. 권력 탈취와 헌정 질서 전복이라는 목적과 실행의 결합을 전제로 하는 중대한 법 개념이다. 그러나 계엄이라는 단어와 군의 이동, 정치적 긴장을 분리해 나열하는 방식으로 내란이 규정되면서, 목적과 구조에 대한 분석은 사라졌다. 법의 정신을 따지기보다 법률 용어의 확장 가능성만이 동원된 셈이다.
정교분리든 내란이든 근본적인 문제는 동일하다. 법을 관계와 구조로 읽지 않고, 단어의 효과로 읽는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몽테스키외의 기준에서 보면 이는 해석이 아니라 법 언어의 기능을 뒤집는 행위다. 권력을 규제하기 위해 존재하던 법이 권력을 정당화하거나 상대를 몰아붙이는 도구로 전락하는 순간, 법의 정신은 사라지고 언어만 남는다.
대통령은 개인이 아니다. 헌법기관이며 국가 권력의 정점이다. 그렇기에 대통령의 헌법 해석은 개인적 의견이 아니라 국가 운영의 기준이 된다. 헌법을 거꾸로 읽는 순간, 정교분리는 권력을 제한하는 원칙이 아니라 권력을 풀어주는 명분으로 변질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종교를 향한 경고가 아니라 대통령 스스로의 헌법 인식에 대한 재정립이다.
민주주의를 말하는 대통령이 헌법을 거꾸로 읽기 시작할 때, 그 위험성은 노골적인 권력 남용보다 더 크다. 무능한 권력은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정당화된 오독’은 스스로를 견제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