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2020 부정선거 수사에 “중국과 5개 국가” 추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0년 대선 부정선거 수사가 국내에 국한되지 않은 것임을 시사해 눈길을 끌고 있다. 여기에는 한국도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5일(현지시간) 아침 워싱턴 힐튼 호텔에서 열린 국가조찬기도회에서 한 연설 중에 주요 각료들을 소개하면서, 툴시 개버드 국가정보국장(DNI)을 "국가 및 국제 정보국장(Director of National and International Intelligence)"이라고 칭했다.
6·25전쟁 발발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서울 곳곳에서 인민재판을 열어 그 자리에서 죽창으로 피고의 가슴에 찌르고, 몽둥이로 머리를 박살내 처형했다.
1950년 6월28일 조선인민군은 서울에 진입했다. 전쟁 발발 사흘 만의 일이었다.
이후 9월28일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기까지 약 석 달 동안, 서울은 단순한 전투 지역이 아니었다. 이 시기 서울은 북한 정권이 남한의 수도에서 직접 통치 방식을 시험한 점령 도시였다.
흔히 이 시기를 전쟁 초기의 혼란기로 묶어 설명하지만, 실제로 북한은 이 기간 매우 조직적이고 일관된 방식으로 서울을 관리하고 통제했다.
판사도 변호사도 없었던 인민재판
북한은 서울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행정, 치안, 선전, 처벌을 아우르는 전면적 통제 체계를 빠르게 가동했다.
그 핵심 장치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인민재판이었다. 이름만 들으면 사법 절차처럼 보이지만, 인민재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재판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판사도 없었고, 변호사도 없었으며, 증거를 다투는 절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인민재판은 판단을 내리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이미 분류된 사람을 공개적으로 낙인찍고 제거를 정당화하는 형식에 불과했다.
점령 직후 서울에는 인민위원회 체제가 구축됐다. 서울시 임시인민위원회는 행정·치안·사법 기능을 동시에 장악했다. 이 체제의 핵심 인물은 남조선노동당의 이승엽이다.
인민위원회와 치안대는 기존의 경찰 조직과 행정망을 대체하며, 점령 이전의 사회 질서를 빠르게 해체하고 재편했다. 이 과정에서 법은 사회 질서를 구축하는 기준이 아니었다. 기준은 계층과 이력, 그리고 점령 이전의 남한에서의 사회적 위치였다.
인민재판은 정식 법정에서 열리지 않았다. 학교 운동장, 동사무소 앞, 동네 공터 같은 일상 공간이 재판장이 되었다.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모인 것이 아니었다. 강제로 동원되었다.
누가 어떤 이유로 끌려 나와 어떤 말 몇 마디로 처벌되는지를 모두가 보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 사람을 공개적으로 처리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곧바로 학습했다.
질문하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는 사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생존과 직결된다는 사실, 침묵이 가장 합리적인 태도라는 사실을 체득했다.
재판의 대상은 경찰 출신, 행정 공무원, 교사, 종교인, 우익 단체 관계자, 반공 활동 이력이 있는 인물들이 우선적으로 지목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개인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었다. 점령 이전 남한에서의 직업과 이력 자체가 죄목이 되었다.
즉결 처형과 학살로 사라진 사람들
인민재판 이후에는 학살과 즉결 처형이 이어졌다.
“반동분자” “앞잡이” “청산 대상”이라는 말이 붙는 순간, 사람은 개인이 아니라 처리 대상이 됐다.
총살, 구타, 집단 처형이 반복되었고, 한강 변과 공동묘지 인근, 형무소 주변에서 사람들이 사라졌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서울대학교병원 학살 사건이다. 1950년 6월28일 전후, 서울대학교병원에 있던 환자와 부상병들이 집단으로 살해되었다.
피해 규모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700명에서 900명 안팎으로 서술된다. 이는 전투 중의 우발적 희생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대규모 학살이었다.
점령기 폭력은 재판과 학살에만 머물지 않았다. 납치와 강제 이동이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급격히 바뀌자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는 구금시설 수감자들을 북으로 이동시키는 작업이 속도를 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1950년 9월17일을 전후해 서대문형무소 수감자들이 집단으로 이송되었고, 그 규모는 최대 3000명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포형무소 등 다른 시설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납치의 대상은 법조계, 행정 공무원, 경찰, 교육계, 종교인, 반공 단체 인사, 사업가 등으로 폭넓게 설정되었다.
이는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점령지에서 제거하거나 확보해야 할 인적 자원을 분류한 결과였다. 전쟁 이전부터 존재하던 ‘필요 인력 확보’ 발상이 점령기 통치 속에서 구체화된 셈이었다.
이런 폭력은 거대한 사건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동네 단위의 연행과 실종이 반복됐다. 마포구 공덕동, 종로, 영등포 등지에서 특정 이력 때문에 숨어 지내던 사람들이 발각되어 끌려갔다.
가족들은 그들이 어디로 끌려갔는지도 모른 채 탄원서를 들고 다녔다. 그러나 많은 경우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사건들은 신문에 크게 실리지도 않았고, 공식 기록에도 자세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누적되면서 서울이라는 도시는 빠르게 침묵 속으로 걸어 들어 갔다.
이 모든 일은 전쟁이라는 혼란 속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건이 아니었다. 이는 북한 정권이 이미 북쪽 지역에서 실행해 온 계급 제거 방식을 남한의 수도에 그대로 적용한 사례였다.
‘전쟁 통의 비극’이라는 말속에 묻어버린 진실
사법이라는 외피를 씌웠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제거였다. 개인의 구체적 행위보다 배경과 관계가 판단의 기준이 되었고, 재판은 처벌을 합리화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전쟁이 끝난 뒤 오랫동안 제대로 이야기되지 못했다. 한국전쟁의 피해가 워낙 컸기 때문에, 서울 점령기 동안 벌어진 일들은 모두 “전쟁 통의 비극”이라는 말 안에 묶여버렸다.
그 과정에서 누가 죽었는지는 말해졌지만, 누가 죽였는지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피해는 남았고, 가해는 흐려졌다.
이 침묵은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 힘을 얻은 좌파 중심의 역사 인식은 자신을 일관되게 피해자의 자리에 놓아 왔다.
일제, 미군정, 남한 정부에 의해 억압받았다는 서술 속에서 좌파는 언제나 당하는 쪽이었고, 폭력은 행사한 적도 없는 존재로 그려졌다. 가해는 늘 외부에 있었고, 자신들은 피해자라는 구도가 굳어졌다.
그러나 1950년 서울 점령기의 인민재판과 학살은 이 구도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 시기 서울에서 벌어진 일들은 좌파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분류하고 제거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래서 이 사건은 불편한 존재가 되었다.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기존의 피해자 이야기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 사건은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민재판과 학살은 구체적인 사건이 아니라, 막연한 비극으로만 기억되었다. 문제는 과거 그 자체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그때 누가 무엇을 했는지를 말하지 않는 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1950년 서울에는 반복되는 장면이 있었다. 동네 공터에 사람들이 불려 나왔고, 이름 하나가 불렸고, 누군가가 앞으로 끌려 나왔다. 긴 설명은 없었다. 몇 마디 호명만 있었고, 그 뒤로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과정을 움직인 것은 법이나 증거가 아니었다. “반동분자” “앞잡이” “청산 대상” 같은 단어였다. 이 말이 붙는 순간, 사람은 개인이 아니라 처리 대상이 됐다. 판단은 사라졌고, 다음 단계는 너무 빠르게 이어졌다.
역사는 위로를 주기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서울 점령기 인민재판과 학살을 말해야 하는 이유는 슬픔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말과 호명만으로 사람을 고립시키고 제거할 수 있었던 방식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남기기 위해서다.
이것을 기록하지 않으면, 폭력은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방식은 남는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침묵은 봉인이다. 그리고 봉인된 가해는 시간이 지나면 다른 말, 다른 이름을 달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이승만학당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