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큰 홍수로 빚어진 수해복구와 이재민 구호를 위해 24억 원의 추경안을 제안했고 17억원을 재해대책예비비로 계상했다. [네이버 고신문 검색] 봄엔 잔디밭에 불이 나도 불꽃이 보이지 않는다. 아지랑이 때문이다. 봄불은 아지랑이 속에 숨어서 피어오른다. 불탄 재의 까만 흔적이 아니라면, 잔디밭에 붙는 불은 알아채기 어렵다.
그러니까 산소 잔디밭 이야기다. 농부들이 일을 하고 잔디밭에 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무심코 버린 것이 불이 난 경우가 많았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난 산소에 올 때는 화기(火器)를 갖고 오지 않는다.
최초의 작은 불꽃을 놓치면, 다음은 가공하리만치 엄청난 산불로 번진다. 바람이 부는 날 산소잔디밭은 그래서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
오늘은 부모님 산소 묘소 잔디에 제초제를 했다. 밭 가운데 있어서 온갖 봄풀이 자란다. 그 중에는 나물 종류도 많다. 아마도 콩나물 빼고, 달래 냉이 씀바귀 나물 종류는 다 난다고 봐야 한다. 어떤 때는 보리싹도 난다.
산소를 돌본다는 것은 잡초를 제거한다는 말의 다름이 아니다. 벌초는 물론이고 제초제도 해야한다. 다행히 선택성 제초제가 있어서 잔디 다치는 일은 없다.
일을 마치고, 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오다가 대산읍 정류장 편의점에서 사온 것이다. 난 강렬한 커피 쓴맛에 적응할 수가 없어서 라떼를 주로 마신다. 혀에 감기는 은은한 단맛과 은근한 쓴맛이 좋다.
멀미등에서 멀리 들을 가로지르는 대산천이 보인다. 금구마을과 우리 마을 사이를 흐르는 하천이다. 옛날에는 법성바다에서 농어새끼며 숭어새끼 모치들이 이 하천까지 올라왔었다. 밀물이면 바닷물도 들어와서, 그 시절엔 선착장도 있었던 모양이다. 배에 관련된 지명이 여럿 있다. 하천공사 중 하천 바닥에서 그 시절 배가 발견된 일도 있었다.
대산천이 거대한 둑길로 변한 것은 하나의 축복이었다. 추억은 하천길을 따라 십여리 흐드러진 왕버드나무 숲으로 달려간다. 그 버드나무는 일부가 지금도 삼태마을에 천연기념물로 남아있다. 하천둑을 보호하고자 심은 버드나무였다. 모두 아름드리 고목들이었다.
밤이면 왕버드나무 우거진 하천엔 도깨비불이. 일어났고, 그 도깨비불이 왔다갔다 하는 모양을 본 우리들은 공포에 질려 말바위 쪽을 바라보곤 하였다. 도깨비들이 말바위에서 나오는 줄만 알았다.
훗날 이 도깨비불의 정체를 알기까지 우리는 대산천에 사는 도깨비가 실제로 사람을 해치는 줄만 알았고, 망태귀신이며 청도깨비들이 사람을 잡아간다는 말에 목을 움추리며 살았다.
더 신비로웠던 것은 버드나무 위로 올라간 가물치들이었다. 비 오고 난 다음날 아침 냇가로 가보면, 버드나무에서 냇물로 떨어지는 가물치들이 있었다. 버드나무에 빗물이 흐르면 가물치가 나무를 타고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저 멀리서 풍덩! 소리가 나면, 그게 가물치 떨어지는 소리였음을 알게 되었다.
"가물치를 바구리에 넣고 버들가지로 덮으면, 한나절이 가도록 죽지 않는단다."
그만큼 가물치와 버드나무는 서로 궁합이 맞는 사이라고 어른들은 말하곤 하였다. 그래서 가물치는 단순한 물고기가 아니라, 내 추억 속 한 편을 자리하는 신비였다.
천재를 미리 방지하라 [고신문]문제는 홍수였다. 오뉴월 모내기가 끝나고 벼가 분얼(分蘖)을 하여 포기가 굵어지는 칠팔월에는 반드시라 할 만큼 홍수가 났었다. 제 아무리 아름드리 왕버들이 둑길을 보호한다 하여도 둑은 터졌고, 온 들판이 물바다가 되었다.
해마다 쌓인 모래로 하상(河床)이 높아지면서 둑은 물을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넘친 물에 잠긴 벼논들은 그대로 모래에 파묻히고, 그해 농사는 망해버리는 것이었다. 해마다 반복되는 불행이었다.
둑이 터지는 것을 '방천( 防川) 났다'고 하였다. 물을 막으려는 둑이 무너져 나가버렸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방천났네' 소리가 들려오면, 우리는 굵은 빗줄기 속에서 둑을 넘어오는 어마어마한 붉은 황톳물을 바라보았다.
어른들은 넋을 잃었고. 우리 어린 것들은 두려움에 떨곤 하였다. 이제 추운 겨울을 어찌 보낼까나. 춘3월 보릿고개 부황든 얼굴들. 어찌 살아낼까나.
아무리 동네사람들이 모여 둑길을 보수해도, 한꺼번에 쏟아지는 홍수는 불가항력이었다. 만석꾼이 살았을 만큼 거대한 들이 홍수와 가뭄에 시달리고 나면, 마을사람들은 굶어야 했다.
1968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였으니까, 근 60여년 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때 불도저를 처음 보았다. 당시 불도저는 대한민국에 몇 대 되지 않았을 때이고, 그것도 경남에 겨우 두 대 있었다는 불도저였다.
그 불도저가 왕버드나무를 넘어뜨리는 모습을 보았다. 앞에서 한 대 치고 뒤에서 밀면 그 거대한 버드나무가 뿌리째 뽑혀나갔다. 하천공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 공사를 명령한 이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셨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께선 민정시찰 중이셨다. 대산읍에 들렀을 때, 고을 유지들이 대산천의 비극을 말하였고, 우리 마을 그 넓은 들을 바라본 대통령께선 즉시 공사를 명하셨다. 그리하여 불도저가 우리 마을에 들어온 것이었다.
이 하천공사는 약 3년이 넘게 지속된 것으로 알고 있다. 멀리 와탄천까지 연결되었으니, 근 오십여리가 넘는 엄청난 공사였다.
이 하천공사를 맡아 감독하셨던 분이 우리 부친이셨다. 집안일 모두 어머님께 맡기고 하천공사일에 매진하셨던 부친께선, 도깨비불 날아다니던 하천길을 없애고 이 거대한 둑길을 남기셨다.
그리고 60여년이 지나는 지금까지 마을은 단 한 차례도 홍수를 겪지 않았다. 마침 통일벼가 심어지기 시작했고, 200평 한 마지기에 나락 10가마(쌀 닷섬)가 수확되는 풍년이 지속되었다. 한 마지기에 겨우 나락 두 가마 수확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하천공사와 통일벼로 우리네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덕에 마을 아이들은 너도나도 유학길에 나서고 공부를 하게 되었다.
부친 하늘로 가신 이 마을에는 지금 불초자식만 남아있다. 그리고 저어기 덕천마을로부터 내려오는 대산천 둑길을 본다. 높이가 3~4미터가 넘는 거대한 혈맥이었다. 그 공사를 하신 부친은 지금 여기 이 산소에 묻혀계신다. 모두가 그때 일을 잊은 것처럼 당신께선 아무 말도 없으시다.
노령의 산맥들이 저 멀리 펼쳐져 있다. 그 산 우거지면서 대산천엔 끊임없이 물이 흐르고 있었다. 혹독한 가뭄이 들어도 들녘이 메마른 적은 없게 되었다.
곧 증조부님과 조부님 산소 단장이 끝나면, 비(碑)를 세워 부모님을 기리고, 대산천에 얽힌 사연을 새겨 후손들에게 전해주어야겠다. 우리 부친께선 박정희 대통령님의 명(命)을 받들어, 이 마을에 홍수와 가뭄을 몰아낸 분이셨다는 말을 꼭 전해 주리라. 그리고 60여년 전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곳에 오셨다는 말 꼭 전해주리라.

◆ 정재학 시인
시인, 국가유공자, 칼럼니스트, 박정희 대통령 홍보위원, 전라도에서 36년 교직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