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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를 가르는 기적의 좌파 : 분열과 갈라치기
글쓴이 : 테오
작성일 : 25-08-18 14:30
조회수 : 63

좌파 정치공학의 다음 수순은 분열이다. 사회를 우리/그들로 쪼개고, 갈등을 영속화해 스스로 ‘중재자’이자 ‘정의의 대변자’로 서는 방식이다. 칼 슈미트가 말했듯 정치의 본질이 적과 동지의 선긋기라면, 이 선을 끝없이 굵게 긋는 자가 이득을 본다. 문제는 그 선이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선이 아니라, 지배를 위한 경계선으로 변한다는 점이다.

역사와 사회를 찢는 “우리 vs 그들”

광우병 사태에서 좌파는 과학 검증보다 “정권은 국민을 위험에 내몬다”는 프레임을 전면화했다. “정권 vs 국민” 구도로 갈라 놓아 국민 내부 불신을 조장하는 일이었다. 또한 좌파는 4·3 역시 복잡한 역사·안보 맥락을 지운 채 “국가폭력 vs 희생자”의 이분법을 사용한다. 사건의 다층적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보다, 정치적 자산을 위한 역사 선점에 몰두했다. 좌파는 과학적·역사적 고증조차 선택적으로 이용해 분열을 키웠다.

한나 아렌트의 통찰이 보여주듯, 전체주의의 언어는 언제나 ‘피해자’와 ‘가해자’ 이분법적 구도를 만든다. 이 서사가 완성되면,  공론장은 토론의 장이 아니라 정치적 의례의 무대가 된다. 사실·인과를 말하는 이는 즉시 ‘가해자 편’으로 낙인찍히고 단두대에 오른다. 정치적 감성이 난무하는 처형식이 시작된다.


젠더 갈등, 국민 내부의 전쟁

분열의 다음 전선은 젠더다. 2010년대 이후 한국의 페미니즘 담론은 성평등을 넘어 남성과 여성을 상호 적대 구도로 몰아넣는 방향으로 변질된 지점이 있다. 인터넷 밈과 결합한 혐오 표현이 이를 가속했다. “한남충”, “개저씨” 같은 혐오표현과 조롱적 밈이 정치와 결합하면, 개인의 구체적 행위보다 정체성 꼬리표를 우선시하게 만들었다.

지역 갈등, 노사 갈등을 넘어 생물학적 차별이 아닌 차이 마저 갈등 이데올로기로 만들 때 세상의 모든 프레임은 적과 동지로 제한된다. 당시 토론 영상을 살펴보면, 좌파들의 태도와 발상은 지금보아도 기가 막히다. 페미니즘을 찬양하지 않는 자는 푸코가 말한 것 처럼  단순한 조롱을 넘어 규율과 징벌로 제단되었다.


피해자 만들기와 정치적 자산화

이런 갈등이 지속되려면 상시적 피해자가 필요하다. 피해자가 있어야 자신들이 ”정의의 대변자“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레임은 늘 간단하다.

“누구를 약자로 만들 것인가?”

노란봉투법은 노동자의 손실을 기업이 무한 책임지도록 하는 방식으로, 노동자를 항상 피해자, 기업을 항상 가해자로 위치시켰다. 민노총이 법을 무시하고 불법 파업을 해도, 그들은 기업을 “가해자로 노동자를 “억눌린 피해자”로 고정했다. 애꿎은 대학교 강당을 박살내도, 언론과 좌파는 “저항”이라 감싼다.

반대로, 북한 괴뢰집단의 도발로 대한민국 군인 46명이 전사한 천안함 폭침은 어떤가? 그 막대한 희생은 정치적 소모품으로 다루어졌다. 세월호는 다행히 ‘피해자’라며 온 국민의 애도를 받았지만, 나라의 안보를 지킨 순군선혈의 피에는 정쟁의 도구로 피해자의 지위조차 선택적으로 주어졌다. 좌파에게 피해자는 발생하는가 만들어지는가? 좌파에게 중요한 것은 이 고통은 소위 ”팔리는가?”가 그 기준이다.

칼 슈미트는 정치의 본질은 적과 동지의 구분이라 했다. 좌파는 그들과 우파 사이에 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팔아먹을 수 있는 곳에 선을 그어 분열을 강화한다.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국민을 길들이던 방식도 이것이었다. 국민을 적과 동지로 갈라 놓고, 끊임없느 공포와 선동으로 스스로 사고할 능력을 마비시킨 뒤, “정의의 중재자” 가면을 쓰고 왕좌에 올라서는것. 오늘날 좌파 정치공학은 히틀러가 갈라치기로 권력을 쥐었던 방식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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