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가 사용하는 정치공학적 언어와 배제의 기술
“국민의 뜻”이라는 말은 정치권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한다. 마치 그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모든 정치적 행위가 정당화되는 듯한 착각을 준다. 그러나 정치언어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그 안에는 권력을 유지·확대하기 위한 설계와 함정이 숨어 있다. 특히 좌파 정치세력의 “국민”이라는 표현은 자유민주주의에서 말하는 국민과는 다른 개념을 품고 있다. 표면상으로는 ‘대한민국의 주권을 가진 전체 구성원’을 지칭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노선을 지지하는 특정 집단, 곧 인민민주주의의 ‘인민’을 가리킨다.
자유민주주의에서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정치적 견해와 무관하게 동등한 권리를 가진 주체다. 그러나 인민민주주의에서 ‘인민’은 곧 ‘정권과 같은 편에 선 사람들’을 뜻한다. 이 틀 안에서 반대 세력은 ‘국민’이 아니라 ‘적폐’로 규정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에 대한 협치와 통합은 불가능하다. 협치와 통합은 오직 인민 내부에서만 가능하며, 반대 진영은 정치적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 청산·배제의 대상이 된다. 이 차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중도층과 일부 보수층은, 좌파의 언어전략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그 결과, 좌파가 설정한 프레임 속에서 ‘극좌를 찬양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합리적 보수마저 극우로 매도되는 구조가 완성된다.
이 배제의 기술은 북한 체제와도 맞닿아 있다. 북한 주민을 ‘조선인민’이라 말하지만, 그 인민에는 당에 충성하는 집단만 포함된다. 나머지는 40여 계층의 계급적으로 분류되어 배제·탄압된다. 좌파 정치언어의 ‘국민’ 개념 역시 동일한 구조를 지닌다. 지도자의 노선을 지지하는 집단은 ‘국민’이지만, 반대자들은 ‘국민의 뜻에 반하는 자’로 낙인찍힌다. 흡사 사이비 종교에서 ‘참 신도’만이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좌파 정치에서의 ‘국민’은 무조건적 충성을 전제로 한 폐쇄적 개념이다.
이재명의 반복적인 “국민의 뜻” 발언이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적 의견을 단일한 ‘국민의 뜻’으로 환원하며, 자신을 그 유일한 대변자로 설정한다.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국민의 뜻’에 반하는 세력으로 낙인찍히고, 정치적 논쟁의 장에서 축출된다. 이런 언어 전략은 민주적 공론장을 무너뜨리고, 여론을 단순한 찬반의 구도로 몰아간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공론장’은 다양한 관점이 부딪히며 새로운 합의를 모색하는 공간이지만, 좌파의 언어가 지배하는 순간 그 공론장은 닫히고, 남는 것은 지도자와 ‘참 신도’들의 폐쇄적 광장뿐이다.
좌파가 말하는 “국민의 뜻”은 대한민국 전체의 뜻이 아니다. 그것은 지도자를 따르는 인민의 뜻이며, 반대자를 배제하고 정당성을 독점하려는 정치공학적 도구다.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에서 국민은 지도자의 정치적 필요에 종속되지 않는다. 국민은 다양한 의견을 가진 독립적 주체이며, 권력은 그 목소리를 조율하고 보장하는 기구일 뿐이다. 따라서 국민의 이름을 남용하며 권력을 강화하려는 정치언어는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이다. 우리는 국민과 국민의 껍질을 가진 인민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정치언어 뒤에 숨은 배제의 기술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