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 시절 강제수용소 생활을 했던 러시아의 노벨상 수상 작가 솔제니친(1918~2008). 그는 소련의 강제수용소 실태를 고발한 ‘수용소 군도’를 발표한 뒤 추방됐다.
많은 사람이 문학에 대해 인간의 삶을 다루는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오랫동안 문학은 사랑과 가족, 전쟁과 죽음, 신앙과 배신, 자유와 운명을 이야기해 왔다.
뛰어난 문학 작품은 독자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 보여 준다.
그래서 수백 년이 지나도 윌리엄 셰익스피어, 미겔 데 세르반테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여전히 읽힌다. 정치 체제는 바뀌어도 인간은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일부 정치사상은 문학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특히 혁명을 추구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은 문학을 인간 이해의 예술이라기보다 사회를 바꾸는 수단으로 이해했다. 문학은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일이 아니라 혁명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졌다. 작가는 예술가이기 전에 혁명가여야 한다는 주장도 등장했다.
이 생각은 이론에 그치지 않았다. 실제 국가 정책이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34년 소련에서 열린 제1차 소비에트 작가대회이다. 이 대회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공식 노선으로 채택되었다.
이름만 들으면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문학처럼 들리지만, 실제 의미는 달랐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이 반드시 성공하는 방향으로 현실을 그려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예를 들어 공장에서 사고가 발생해 노동자가 고통받더라도 체제의 문제를 비판해서는 안 되었다. 농민들이 굶주려도 집단농장의 실패를 사실대로 묘사하기 어려웠다.
대신 노동자는 당을 믿고 성장하며, 공장은 발전하고, 사회주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결말이 요구되었다. 작품의 마지막에는 희망이 있어야 했고, 그 희망은 언제나 공산당이 제시하는 미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많은 작가들이 탄압을 받았다. 미하일 불가코프는 작품 발표에 큰 제약을 받았고, 안나 아흐마토바는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제한당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훗날 소련의 강제수용소 실태를 고발한 ‘수용소 군도’를 발표한 뒤 추방되었다. 문학이 권력을 비판하는 순간 국가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중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1942년 마오쩌둥은 ‘옌안 문예강화’에서 문학과 예술은 노동자·농민·병사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 연설은 중국 현대 문예 정책의 출발점이 되었다. 작가는 자유롭게 인간을 탐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혁명 노선을 전달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 결과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더욱 극단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혁명을 찬양하는 작품은 장려되었지만, 개인의 사랑이나 인간의 고뇌를 다룬 작품은 ‘부르주아 문학’이라는 이유로 비판받는 경우가 많았다. 다양한 문학이 공존하는 대신 정치적으로 올바른 작품만 살아남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북한은 이 원칙을 더욱 철저하게 받아들였다. 북한 소설과 영화, 시와 노래의 중심에는 거의 예외 없이 당과 수령이 등장한다. 개인의 행복은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설명되고, 등장인물은 인간적인 갈등보다 체제에 대한 충성을 보여 주는 역할을 맡는다. 문학이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예술이라기보다 국가 선전의 일부가 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런 사례는 공산권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서유럽과 미국에서도 20세기에는 혁명이나 계급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문학 운동이 등장했다. 다만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문학 사조가 함께 존재했고, 국가가 하나의 문학만 강요하지는 못했다. 이것이 전체주의 국가와 자유사회의 중요한 차이였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사회를 비판하는 문학과 문학을 정치 선전으로 사용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조지 오웰은 전체주의를 강하게 비판했지만 그의 작품인 ‘동물농장’과 ‘1984’는 특정 정당의 선전물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와 권력의 위험성을 문학적으로 탐구한 작품이다. 반대로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들은 처음부터 독자가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지를 정해 놓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좋은 문학은 독자에게 생각할 자유를 남겨 둔다. 나쁜 선전은 독자가 반드시 같은 결론에 도달하도록 만든다. 문학은 질문을 던지는 예술이지만, 선전은 정답을 암기시키는 기술이다.
문학이 특정 사상을 담을 수는 있다. 모든 작가는 자신의 가치관을 작품에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의 목적이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는지, 아니면 독자를 특정 정치사상으로 이끌려는 데 있는지는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문학이 인간보다 이념을 먼저 설명하기 시작하는 순간, 독자는 작품을 읽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메시지를 소비하게 된다. 그것이 문학의 사상화가 가진 가장 큰 문제이다.

◆ 松山(송산)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펴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