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과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산업상,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2일(현지시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채플힐에서 열린 G20 혁신장관회의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G20 회원국들은 이번 회의에서 미국이 제시한 ‘신흥기술에 관한 캐롤라이나 원칙’에 컨센서스로 참여했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채플힐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혁신장관회의가 미국 현지시간 2일 막을 내렸다. 미국 상무부와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이 주도한 이번 회의에서 회원국들은 ‘혁신장관 성명’과 ‘신흥기술에 관한 캐롤라이나 원칙’에 합의했다.
성명은 “신흥기술이 번영을 열고 생산성을 높이며 모든 국민에게 기회를 확대할 잠재력이 있다”고 선언했다. 이를 위해 기초연구에 투자하고 기술의 사업화 경로를 강화하며, 신뢰할 수 있는 기술의 채택과 보급을 촉진하기로 했다.
표면만 보면 익숙한 기술협력 선언이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가 동시에 추진하는 정책들을 하나의 지도 위에 올려놓으면 전혀 다른 문서로 읽힌다.
트럼프는 단순히 AI 산업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 AI가 개발되고 거래되며, 결제되고 전력을 공급받고, 국경을 넘는 방식까지 설계하고 있다. 미국 기업이 기술의 기반을 만들고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그 위의 거래를 결제하며, 에너지와 원료가 이를 지탱하는 구조다.
이것이 트럼프가 구상하는 AI 시대의 신국제질서다. 캐롤라이나 원칙도 이 틀에서 읽어야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난다.
규제 완화라는 이름의 장벽 제거
이번 혁신장관 성명은 친혁신적 정책체계, 기술을 통한 기회와 번영, 기술인력 양성, AI와 지식재산권, AI를 위한 표준과 표준을 위한 AI, 산업혁신과 공급망 투자 등 여섯 개 축으로 구성됐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친혁신적 정책체계’다. 성명은 기존 산업 규제를 우선 적용하고, 기존 법률로 다룰 수 없는 새로운 문제가 생겼을 때만 새 규제를 검토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시장 진입을 가로막는 불필요한 장벽과 과도한 허가 절차, 부당한 기술이전 요구도 제거 대상으로 규정했다.
미국 국내에서 이것은 규제 완화다. 그러나 국경을 넘는 순간 의미가 달라진다. 다른 나라의 법률과 허가제도, 데이터 규제와 인터넷 장벽이 미국 기업의 진출을 막는다면 제거해야 할 ‘시장 접근 장벽’으로 규정될 수 있다.
AI는 상품을 컨테이너에 실어 세관을 통과시키는 산업이 아니다. 데이터와 알고리즘, 클라우드와 결제망이 인터넷을 통해 국경을 넘는다. AI 시대의 시장 개방은 관세를 낮추는 문제보다 인터넷과 데이터의 통로를 여는 문제가 된다.
자본시장은 면허와 외환규제를 통해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정보와 지능이 실시간으로 이동하는 디지털 시장이 개방되면 산업과 소비, 금융과 여론, 국가안보의 경계까지 함께 흔들릴 수 있다. AI 시대의 국가주권이 기존 영토주권만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이유다.
캐롤라이나 원칙은 규제 완화를 말하지만 그 규제가 국경에 설치된 디지털 장벽이라면, 결국 장벽 제거의 원칙으로 작동할 수 있다.
중국은 문을 열 것인가, 해외시장을 포기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중국이 캐롤라이나 원칙의 컨센서스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중국은 미국의 주요 플랫폼과 인터넷 서비스를 차단하고 데이터의 국외 이전을 통제한다. 알고리즘과 클라우드, 보안심사와 사업 인허가에도 높은 장벽을 두고 있다. 그러면서 중국의 AI 모델과 디지털 상품은 해외시장에 진출하려 한다.
이런 비대칭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캐롤라이나 원칙에 ‘중국의 인터넷 장벽을 철폐한다’거나 ‘상호주의를 적용한다’는 조항은 없다. 법적 구속력도 없는 선언이다. 중국이 인터넷 개방에 동의했다고 해석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미국이 다음 단계에서 상호주의를 꺼내 들 수 있는 명분의 언어는 마련됐다. 미국 시장에서 중국의 AI와 디지털 상품을 판매하려면 중국도 미국의 AI와 클라우드, 디지털 서비스에 같은 수준의 접근을 허용하라는 요구다.
중국이 문을 열면 미국 AI 기업들이 거대한 중국시장으로 들어간다. 문을 닫으면 중국 AI가 세계시장에서 상호주의에 따른 시장 접근 제한을 받을 수 있다.
트럼프는 중국을 단순히 막으려는 것이 아니다. 반도체와 시장 접근권을 지렛대로 중국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이다. 봉쇄는 목적이 아니라 개방을 끌어내기 위한 압력이다.
중국의 거대한 내수시장과 국가 지원은 단기적인 방어막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구 감소와 내수 둔화 속에서 자국시장만으로 첨단 AI 생태계의 막대한 투자를 계속 감당하기는 어렵다. AI 모델은 이용자와 데이터, 자본과 해외시장을 더 많이 확보할수록 빠르게 발전한다.
중국은 인터넷과 데이터 시장을 열어 미국 기업과 정면으로 경쟁하거나, 폐쇄를 유지한 대가로 세계시장에서 고립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캐롤라이나 원칙이 당장 중국을 움직이는 강제규정은 아니지만 중국의 선택지를 좁힐 국제적 언어가 될 수 있는 이유다.
더 주목할 대목은 중국도 미국이 제시한 ‘혁신과 장벽 제거’의 언어에 컨센서스로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AI 기술 위에 달러와 에너지를 얹다
캐롤라이나 원칙이 AI가 국경을 넘는 시장의 규칙이라면,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그 시장에서 사용될 결제수단이 될 수 있다.
트럼프 정부가 각각 발표한 AI 수출정책과 스테이블코인 정책을 연결하면 더 큰 구상이 보인다. 미국 정부가 두 정책을 하나의 공식 전략으로 직접 명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의 AI 기술이 세계로 확산되고 그 거래가 달러 기반 디지털 결제망을 통해 이뤄진다면 AI 시대에도 달러의 지배력은 유지될 수 있다.
트럼프는 2025년 7월 GENIUS Act에 서명해 지급결제용 스테이블코인의 연방 규제체계를 마련했다. 같은 달 발표된 ‘미국 AI 행동계획’은 하드웨어·모델·소프트웨어·응용프로그램·표준을 하나로 묶은 ‘풀스택 AI’를 동맹과 파트너 국가에 수출하겠다고 밝혔다.
서로 다른 정책이지만 방향은 한곳을 향한다. 미국의 AI가 세계의 기술 기반이 되고,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그 위의 거래를 결제하는 구조다.
과거 미국의 패권은 달러와 석유, 해상교통로를 중심으로 작동했다. AI 시대에는 달러 스테이블코인과 AI 플랫폼, 반도체와 클라우드가 그 자리를 대신하거나 보완할 수 있다.
그러나 기술과 화폐만으로 AI 질서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이를 물리적으로 작동시킬 전력과 원료가 필요하다.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을 24시간 돌리려면 원전과 소형모듈원자로(SMR), 수소발전과 에너지저장장치(ESS), 송배전망과 냉각설비가 하나의 체계로 결합돼야 한다.
태양광 패널의 순간 발전단가가 낮다는 것만으로 AI 전력 경쟁을 설명할 수 없는 이유다. AI 데이터센터가 요구하는 것은 날씨에 따라 출렁이는 전기가 아니라 24시간 중단되지 않는 고밀도·고품질 전력이다. 저장장치와 예비발전, 송전망과 전력변환 설비까지 포함한 완결형 공급비용으로 계산해야 한다.
SMR도 먼 미래의 구상이 아니다. 중국과 러시아에서는 이미 가동되고 있고 미국과 영국에서는 부지 선정과 발주, 인허가가 실제 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먼저 가동했다고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원자로가 돌아간다는 것과 세계가 그 원자로를 신뢰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안전인증과 부품 규격, 핵연료 공급, 사이버보안과 운전 소프트웨어, 금융과 보험, 폐기물과 폐로까지 수십 년간 믿고 맡길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승부는 최초 개발보다 기술표준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달렸다. 캐롤라이나 원칙의 표준 논리도 향후 AI를 구동하는 반도체·데이터센터·전력 인프라의 상호운용성 논의로 이어질 수 있다. 기술을 먼저 만든 기업은 바뀔 수 있지만 표준을 장악한 국가는 시장의 진입조건을 정하고 부품과 유지보수 시장까지 오랫동안 지배한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이 2일(현지시각) 노스캐롤라이나주 채플힐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혁신장관회의에서 오픈AI 창립자 샘 올트먼과 대화하고 있다. 회의 도중 CNBC 방송과 인터뷰에서 향후 반도체 관세가 “표적화되고(targeted) 신중한(thoughtful) 관세 정책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AFP/연합뉴스 ]
가치동맹에서 기술동맹으로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지 고민한다면, AI 시대의 기술표준을 어느 나라가 선점할 것인지를 판단하면 답이 나온다.
중국은 거대한 내수시장과 생산 규모를 갖고 있다. 그러나 폐쇄된 인터넷과 국가 중심의 데이터 통제 아래에서는 다른 나라들이 자발적으로 채택할 세계표준을 만들기 어렵다. 표준은 기술력과 가격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세계가 그 기술과 제도를 믿어야 한다.
가치동맹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치동맹은 추상적인 외교 구호가 아니다. 민주주의와 법치, 시장경제와 사유재산권, 지식재산권과 정보의 자유를 공유하기 때문에 핵심기술과 데이터를 서로 맡길 수 있다. 반도체 설계도를 공유하고 원자로를 건설하며 클라우드와 결제망을 연결할 수 있게 하는 신뢰의 기반이다.
가치동맹이 신뢰를 만들고, 신뢰가 기술동맹을 가능하게 한다. 기술동맹은 공동표준을 만들고, 공동표준은 공동시장을 만든다.
한미 기술동맹을 강화해야 하는 이유도 미국이 강해서만은 아니다. 한국의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배터리와 로봇, 원전과 SMR, 수소발전과 정밀제조 기술을 세계표준으로 만들 가장 현실적인 통로가 미국의 소프트웨어와 시장, 인증·금융체계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물어야 할 것은 ‘AI 3강’에 들어갈 수 있느냐가 아니다. 미국이 기술과 시장, 화폐와 에너지를 하나로 묶어 새로운 국제질서를 설계하는 동안 한국은 그 질서의 규칙을 함께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남이 만든 질서에 반도체 공장과 데이터센터만 제공하고 있는가.
가치동맹을 기술동맹과 공동표준으로 발전시키지 못하면 한국은 AI 강국이 아니라 AI 하드웨어 공급기지에 머물 수 있다.
캐롤라이나 원칙은 한국에 기회를 보장하는 문서가 아니다. 미국이 먼저 제시한 질서에 한국이 어떤 자격으로 참여할 것인지를 묻는 문서다.
캐롤라이나 원칙은 AI 시대 신국제질서의 완성본이 아니다. 그러나 AI가 개발되고 거래되며 국경을 넘는 데 적용될 미국식 규칙의 첫 국제적 설계도로 볼 수 있다. 중국까지 그 설계도에 컨센서스로 참여했다.
미국은 이미 AI 시대의 질서를 설계하고 있다. 캐롤라이나 원칙이 섬뜩한 것은 좁아지는 것이 기술의 가능성이 아니라 각 나라가 선택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핵심 원문 * [백악관—G20 혁신장관회의 컨센서스 발표] * [미국 상무부—신흥기술에 관한 캐롤라이나 원칙] https://www.commerce.gov/issues/g20-innovation-ministerial/carolina-principles-emerging-technologies * [미국 상무부—G20 혁신장관 성명 전문(PDF)] * [백악관—미국의 AI 행동계획 전문(PDF)] https://www.whitehouse.gov/wp-content/uploads/2025/07/Americas-AI-Action-Plan.pdf * [백악관—미국 AI 기술 스택 수출 촉진 행정명령] * [미 연방법—GENIUS Act 전문(PDF) https://www.congress.gov/119/plaws/publ27/PLAW-119publ27.pdf * [백악관—한미 기술번영협정] https://www.whitehouse.gov/releases/2025/10/u-s-korea-technology-prosperity-dea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