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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500년 잠에서 깨어난 신라 황금문화…"100% 순금은 아닙니다"
  • 연합뉴스
  • 등록 2025-10-27 12:4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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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500년 잠에서 깨어난 신라 황금문화…"100% 순금은 아닙니다"


경주서 한자리에 모이는 금관 6점 특징과 유물에 얽힌 이야기는


푸른 유리구슬 덕분에 첫 발견…스웨덴 황태자, 발굴 참여하기도


과거 도굴됐다가 압수된 적도…왕의 상징? 장례용품? 연구 계속


우리 손으로 발굴한 신라 금관 우리 손으로 발굴한 신라 금관 왼쪽부터 국보 '황남대총 북분 금관', 국보 '천마총 금관' 모습. 구본창 사진작가 촬영 [국립경주박물관·구본창 작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1921년 9월 당시 경주 읍남 노서리, 경주경찰서 순사였던 미야케 요산(三宅與三)은 동네 아이들을 주시했다.


아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마치 보물찾기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그때 일본인 경찰의 눈에 띈 건 파란색 유리구슬이었다. 그는 훗날 경찰서장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옛 무덤에서 나온 옥이 아닐까 짐작했다고 밝혔다.


우연한 계기로 드러난 무덤에는 신라의 금빛이 잠들어있었다. 5세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 약 150년간 이어진 황금 문화의 전성기를 집약한 흔적이다.


'경주 금관총 발굴 조사 보고서' 표지 및 도판 '경주 금관총 발굴 조사 보고서' 표지 및 도판 2011년 발간된 국역 '경주 금관총 발굴 조사 보고서'에 실린 사진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국내에서 발견된 신라 금관 6점 가운데 그 존재가 가장 먼저 알려진 건 금관총 금관이다.


머리띠 위에 3개의 나뭇가지 모양과 2개의 사슴뿔 모양 세움 장식을 더한 형태로 높이는 27.7㎝, 무게는 692g에 달한다. 전형적인 신라 금관의 모습이다.


신라 금관이 처음 발견돼 금관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2013년 금관총에서 출토된 큰 칼을 보존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사지왕'(尒斯智王) 명문이 새롭게 확인됐고, 이후 '이사지왕의 칼'이라고 새겨진 칼집 조각을 추가로 찾아내기도 했다.


2011년 발간된 국역 '경주 금관총 발굴조사 보고서' 속 도판 2011년 발간된 국역 '경주 금관총 발굴조사 보고서' 속 도판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교동 금관은 현존하는 신라 금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1969년 경주 교동에서 도굴꾼이 몰래 무덤을 파헤쳐 작은 금관을 찾았다. 도굴꾼은 1972년 이 금관을 팔려다가 체포됐고, 이후 압수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지금으로부터 1천500여 년 전인 5세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나, 정보가 많지 않고 도굴품이라는 '오명'이 남아있다. 국보·보물인 다른 금관과 달리 국가지정유산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머리띠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둥근 달개(금관 등에 매달아 반짝거리도록 한 얇은 쇠붙이 장식)만 달려 있다. 지름이 14.3㎝에 불과해 어린아이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신라의 금관 신라의 금관 왼쪽부터 교동 금관, 국보 '금관총 금관 모습. 구본창 사진작가 촬영 [국립경주박물관·구본창 작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1924년 섬세하게 만든 금방울(金鈴·금령) 한 쌍과 함께 발견된 금령총 금관의 주인도 어린 왕족으로 추정된다. 금령총 금관은 높이가 27㎝, 무게가 356.4g이다.


금 허리띠, 귀걸이 등도 다른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과 비교하면 작은 편이다.


이현태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지난해 금령총의 주인을 "6세 이하의 남아"로 추론하며 "금관총의 주인, 즉 이사지왕의 아들"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해 주목받았다.


1926년 경주 서봉총 금관 출토 당시 모습 1926년 경주 서봉총 금관 출토 당시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봉총 금관은 스웨덴 왕세자와의 인연이 눈길을 끈다.


1926년 기관차 차고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이 무덤에서는 금관, 은제 합(盒·높지 않고 둥글넓적하며 뚜껑이 있는 그릇을 뜻함) 등 금속품과 칠기, 토기 등이 출토됐다.


훗날 스웨덴의 국왕이 되는 구스타프 6세 아돌프(1882∼1973)는 당시 왕세자 신분으로 동아시아 일대에서 여행 중이었는데, 유물 발굴 과정에 참여했다.


스웨덴의 한자 표기인 '서전'(瑞典)과 금관에 장식된 '봉황'(鳳凰)에서 이름을 따 서봉총이라고 부른다.


경주 금관총 서면을 촬영한 유리건판 경주 금관총 서면을 촬영한 유리건판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천마총과 황남대총 금관은 우리 손으로 발굴해낸 유물로서 의미가 크다.


천마총 금관은 6점의 금관 가운데 가장 크고 무겁다. 머리띠의 길이는 63㎝, 무게는 1.3㎏에 달하며 반달 모양으로 다듬은 장식용 옥 58개가 달려있어 화려하다.


천마총은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1973년 문화재관리국(지금의 국가유산청)이 주도해 발굴한 무덤으로, 신라 금관을 비롯해 1만1천526점의 유물이 쏟아져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새의 날개가 펼쳐진 듯한 금제 관식(冠飾) 2점도 함께 선보인다.


경주 금령총 발굴 전 모습경주 금령총 발굴 전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황남대총 북분(北墳·북쪽 무덤)에서 나온 금관은 교동 금관을 제외하고 발굴 조사를 거쳐 확인된 금관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신라 무덤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황남대총은 북쪽과 남쪽에 하나씩 총 2개의 무덤이 있다.


남쪽 무덤에서는 금동관이, 북쪽에서는 화려한 금관이 나왔는데 금관과 함께 출토된 허리띠에서 '부인대'(夫人帶)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왕비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김대환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남분 주인공이 내물왕(재위 356∼402)이라면 보반부인 김씨, 실성왕(재위 402∼417)이라면 아류부인, 눌지왕(재위 417∼458)이라면 실성왕의 딸 김씨로 비정된다"고 설명했다.


신라의 금관 신라의 금관 왼쪽부터 보물 '금령총 금관', 보물 '서봉총 금관' 모습. 구본창 사진작가 촬영 [국립경주박물관·구본창 작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신라 황금 문화의 전성기에 만들어진 금관은 100% 순금일까.


박물관은 "겉으로는 눈부시게 빛나지만, 실제로는 금에 은을 섞어 만든 합금"이라며 "순금이 지나치게 무르고 쉽게 휘어질 수 있어 강도를 보강하려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교동 금관은 순도가 21.4k지만, 서봉총 금관은 19.3K로 차이가 있다.


박물관 관계자는 "시대에 따라 금의 순도가 달라진다"며 "초기의 금관은 순도가 높은 편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은의 함량이 늘어 순도가 낮아졌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때 출토된 신라 금관 모습 일제강점기 때 출토된 신라 금관 모습 왼쪽부터 금관총 금관, 금령총 금관, 서봉총 금관을 촬영한 유리건판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신라의 왕이 금관을 실제 썼는지는 아직 풀리지 않은 부분이다.


실제 각 무덤에서 발굴됐을 당시 모습을 보면 금관은 고깔 모양으로 휘어져 있다. 망자의 얼굴을 덮는 용도였을 거라며 '데스마스크'(death mask)로 보는 견해도 있다.


박물관은 전시 도록에서 서봉총 금관 내부에서 발견된 둥근 모자를 예로 들며 "장송용에 국한되지 않고, 특정한 상황에서는 실제 착용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신라 금관 6점을 처음으로 모은 전시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일반 관람은 11월 2일부터. 연합뉴스


전시실 모습전시실 모습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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