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침묵 속에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고립은 깊어만 간다.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 엄석대(홍경인 분). 소셜미디어·영화스틸컷
심규진 스페인IE대 디지털미디어학과 교수
“저 새끼 진짜 나쁜 놈이에요.”
이문열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이 말은 정의의 외침이 아니라 면책을 위한 고발이었다.
엄석대 체제가 굳건할 때 그 곁에서 이익을 나누던 아이들은 침묵했고, 체제가 무너진 뒤에야 가장 큰 목소리로 엄석대를 비난한다.
지금 윤석열 이후의 정치 지형에서도 이 장면은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한 가지는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윤석열은 그를 둘러싸고 기회주의적으로 움직였던 인물들과 같은 범주에 놓일 수 있는 정치인이 아니다. 윤석열의 정치는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관된 진정성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의대 정원 확대 문제다. 당시 의대 증원은 국민 여론조사에서 70% 이상이 찬성하던 사안이었다. 의료 카르텔 구조를 흔들고 장기적 국가 인프라를 재설계하겠다는 분명한 문제의식이 있었다.
윤석열은 정치적으로 가장 안전한 선택— 말을 흐리고, 시간을 끌고, 타협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윤석열은 철저히 고립되었다. 당내 핵심 인사들, 이른바 ‘원조 친윤’으로 불리던 인물들, 윤한홍을 비롯한 중진들은 당당하게 정책을 방어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장외에서 함께 여론전을 벌이지도 않았다.
의사 집단의 반발이 거세지고, 좌파 진영의 공세가 시작되자 그들은 흔들렸다. 정책을 지지하지도 대통령을 엄호하지도 책임을 지지도 않았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윤석열만 홀로 전면에 서 있었고, 당은 침묵했다. 정치를 계속하겠다면 그때 왜 침묵했는지 설명해야 한다. 그 책임을 질 생각이 없다면 차라리 정치를 그만두는 것이 정상적인 태도다.
윤석열이 남긴 것은 의대 증원 하나만이 아니다. 그는 방산 산업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끌어올렸고, 원전 정책을 복원하며 에너지 안보라는 근본 문제를 다시 꺼냈다.
또한 문재인 정부 시기 흔들렸던 한미일 동맹을 재건하며 대한민국의 외교·안보 좌표를 분명히 했다. 이 모든 것은 단기적 인기와는 거리가 먼 선택이었다. 윤석열은 국가 체제를 다시 세우는 전선을 분명히 그었다.
그래서 윤석열은 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지지층을 남긴 정치인이 되었다. 특히 2030 세대가 느끼는 지금의 체제 위기는 윤석열이 이미 경고했던 지점들과 겹친다.
이재명의 정치가 보여주는 권력의 사유화, 사법부까지 압박하려는 시도, 헌법 정신의 훼손, 극단적 친중 노선과 한미일 동맹에 대한 불신 조장은 윤석열이 반복해서 문제 삼았던 사안들이다. 오늘날 많은 2030 유권자가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구체적인 체제 위기를 체감하고 있는 이유다.
윤석열은 이 위기를 최초로 언어화한 대통령이었다. 그 경고가 완전히 틀렸다고 지금 누가 단언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윤석열 곁에 있었던 일부 인사들은 이제 와서 윤석열을 ‘문제적 인물’로만 규정하며 모든 책임을 그에게 전가하려 한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담임 교사는 엄석대를 고발한 아이들을 칭찬하지 않는다. 오히려 묻는다.
“그때는 왜 말하지 않았지?”
지금 정치권에도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 윤석열이 체제 전쟁을 선언했을 때, 윤석열이 방산·원전·동맹을 외쳤을 때, 윤석열이 의료 개혁을 밀어붙일 때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때는 침묵하다가 이제 와서 “저 새끼 진짜 나쁜 놈이에요”라고 외치는 고발은 정치적 용기가 아니라 기회주의의 언어다.
윤석열은 완벽한 대통령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기회주의자들과 달리 자신이 옳다고 믿은 전선에 끝까지 서려 했던 인물이었다.
그 전선을 외면하고, 그를 고립시켜 놓고 이제 와서 돌을 던지는 이들이야말로 스스로의 정치적 책임을 먼저 돌아봐야 한다.
정치는 권력이 사라진 뒤의 고발이 아니라 권력이 작동할 때의 선택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의 기록은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대학교수·작가
◆ 심규진 교수
스페인IE대학교 디지털미디어학과 조교수
전 국방부 전략기획자문위원
전 여의도연구원 데이터랩 실장
전 호주 멜버른 대학교 전임교수
전 싱가포르 경영대학교 조교수
저서 ‘K-드라마 윤석열’ ‘하이퍼 젠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