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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개헌 논의보다 ‘선거 공정성’ 확보가 먼저다
  • 관리자
  • 등록 2025-12-16 17: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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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거제도는 행정 기술 아닌 헌정 질서의 전제 조건
  • 투표율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할 수 있는 구조 갖추는 것
  • 제도 개혁 선행되지 않으면 통합 헌법 아닌 갈등 헌법

투표지 분류기. 연합뉴스

최근 개헌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이와 함께 권력구조 개편, 책임총리제, 양원제 등 다양한 구상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 논의에는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빠져 있다. 개헌이 과연 어떤 정당성 위에서 추진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개헌은 추상적 정치 담론이 아니다. 헌법 개정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하며 국민투표라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다시 말해 개헌 역시 선거로 구성된 국회와 또 하나의 선거를 통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헌의 정당성은 선거의 투명성이 보장될 때만 확보될 수 있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지금의 이 문제 제기는 특정 선거 결과의 정당성을 부정하자는 주장도, 부정행위를 단죄하자는 주장도 아니다. 다만 헌정 질서를 지탱하는 선거제도가 의혹이 생겼을 때 스스로 신뢰를 증명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 수가 아니라 그 결과를 얼마나 납득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투표율은 참여의 규모를 보여주는 지표일 뿐, 헌정 질서를 지탱하는 핵심은 선거 결과를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신뢰성에 있다. 이긴 쪽의 환호보다 중요한 것은 진 쪽의 승복이며, 승복은 신뢰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거제도는 단순한 행정 기술이 아니다. 신뢰할 수 있는 선거제도야말로 헌정 질서를 지탱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선거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그 위에 세워진 입법·행정·사법 삼권의 정당성 또한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 기준에서 선진 민주국가들의 선거제도에는 공통점이 있다. 의혹이 없어서 신뢰받는 것이 아니라, 의혹이 제기돼도 제도가 이를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신뢰받는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사망자 투표가 드러난다는 것은 그만큼 투표 기록을 철저히 보관하고 검토하는 제도가 꼼꼼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이런 것은 미국의 경우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독일은 전자투표의 편리함보다 검증의 확실성을 중시하여 종이 투표를 원칙으로 삼으며, 모든 개표 과정을 시민에게 공개한다. 독일 헌법재판소는 “선거는 특별한 전문지식이 없는 시민도 그 과정을 이해하고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 

 

이는 기술의 편리함보다 ‘시민이 직접 확인하고 감시할 수 있는가’를 헌법의 더 중요한 원칙으로 삼고 있다는 뜻이다.

 

캐나다 역시 마찬가지다. 투표와 개표 기록을 장기간 보존하고, 선거 이후에도 연구자·시민단체·언론의 사후 분석을 제도적으로 허용한다. 

 

선거 관리 기관은 비판적인 보고서까지도 공개하며, 선거에 대한 문제 제기를 선거 불복으로 낙인찍지 않는다. 의혹이 생겼을 때 이를 제대로 검증할 수 있는 장치가 있어야 신뢰가 유지된다.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이들은 선거 자체는 중요하게 여기지만 결과를 맹신하지 않는다. 대신 기록·공개·검증이라는 절차를 절대적으로 중시한다. 

 

따라서 선거 과정에서 오류가 발견되어도 이를 시스템의 실패로 보지 않고, 오히려 검증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는 증거로 받아들인다.

 

반면 선거제도에 대한 정당한 의문을 음모론으로 몰아세우는 태도는 신뢰 회복의 걸림돌이 된다. 의구심을 음모론으로 일축하는 순간, 국가는 스스로 신뢰를 증명할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여론재판이 제도를 대신하게 되는 이유는 유권자가 무리한 요구를 해서가 아니라, 제도가 믿음을 줄 만큼 투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원의 판결은 여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지만 누구나 그 판결 과정을 들여다보고 검토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정당성을 얻는다. 선거도 이와 같다. 승패라는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투명한 검증 과정이다.

 

이 상태에서 개헌을 서두르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접근이다. 헌법을 바꾸기 전에, 헌법을 만드는 절차에 대한 신뢰부터 회복해야 한다. 선거제도에 대한 불신을 방치한 채 추진되는 개헌은 통합의 헌법이 아니라 갈등의 헌법이 될 가능성이 크다.

 

개헌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개헌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그 시작은 권력구조를 어떻게 바꿀지를 두고 논쟁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선거 과정을 누구나 확인하고 검증할 수 있는지, 투명하게 기록을 공개하고 독립적으로 감시하는지 등 선거의 신뢰를 되찾는 일이 우선이다.

 

헌법은 선거를 통해 세워지고, 선거는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존재한다.

 

신뢰가 무너진 상태에서 추진하는 개헌은 미래를 위한 설계가 아니라, 오히려 불신을 공식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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