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서너 사람만이 도드라져 움직이는 영화가 상상 초월의 흥행 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사진= ‘왕과 사는 남자’ 포스터 일부]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3월20일자로 1410만 관객을 ‘돌파’했다. 역대 흥행 5위다.
단종 역할을 맡은 배우는 박지훈, ‘아이돌’이라 한다. 애쓴 연기였다. 엄흥도 역할을 맡은 배우 유해진은 명연기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유해진 씨가 화면 전체를 메우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낀 것은 필자뿐이었을까? 물론 한명회 역의 유지태 배우도 한몫했다.
이 구성 단순한 이야기, 극 중에 오로지 서너 사람만이 도드라져 움직이는 영화가 상상 초월의 흥행 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
모리배가 득세하는 세상, 사육신의 피를 생각하다
장항준 감독이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말한다. “광란의 시대에 의를 실천한 사람, 죽음을 무릅쓰고 옳은 일을 하신 분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지켜내려고 했던 분들의 얘기를 그려내 보고자 했”다. 감독은 이 시대가 정녕 ‘미친 바람’의 시대임을 알고 계시다는 뜻이겠다.
어떤 인터뷰에서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에게 최근 단종이 주목받는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의 대중들에게 어떤 쿠테타라든지 어떤 정권 찬탈이라든지 이런 사안에 대해서 훨씬 더 예민해진 부분들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왕과 사는 남자’가 뜻밖의 흥행을 하자 단종의 비극적인 일을 그린 춘원 이광수의 ‘단종애사’(동아일보, 1928.11.30~1929.12.11)도 덩달아 판매가 뛰어올랐다. ‘조선왕조실록’을 키워드로 삼은 책들도 판매지수가 폭증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호장(戶長) 엄흥도의 일이 여러 대에 걸쳐 거듭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그 하나의 예로 ‘중종실록’에서 우승지 신상(申鏛)이 임금께 아뢴다.
“사람들 말이 ‘당초 돌아갔을 때 온 고을이 황급하였는데, 고을 아전 엄흥도(嚴興道)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 하며,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애상(哀傷)스럽게 여긴다.”
‘현종실록’에도 송시열 등이 임금께 다음과 같이 아뢰고 있다.
“노산군(魯山君)이 해를 입었을 때 아무도 거두어 돌보지 않았었는데, 그 고을 아전 엄흥도(嚴興道)가 곧바로 가 곡하고, 스스로 관곽(棺槨)을 준비해 염하여 장사를 치렀으니, 지금의 노묘(魯墓)가 바로 그 묘입니다. 흥도의 절의를 사람들이 지금까지 일컫고 있습니다.”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寧越) 청령포(淸泠浦)에 유배 내려온 단종(端宗) 이홍위(李弘暐)를 아무도 찾아보지 않는다. 오로지 고을 아전 엄흥도만이 남모르게 정성을 바친다.
청령포의 울음소리가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 것
‘고종실록’을 보면, 엄흥도의 후손 엄주호(嚴柱鎬)가 임금께 상소를 올려 선조 엄흥도의 일을 상세하게 고한다.
“신의 선조인… 엄흥도는 단종 때에 충성을 다하여 끝까지 섬긴 신하입니다. 단종 대왕께서 임금의 자리를 물려준 다음 해인 병자년(1456)에 영월 청령포에 옮겨 갔을 때는 마침 늦은 봄이었습니다.
단종께서 근심에 싸여서 홀로 앉아 자규(子規) 시를 읊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사육신이 꿈에 나타나서 마치 살았을 때와 같이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였다고 합니다.
단종께서 문득 깨어나 울면서 매우 슬퍼할 때에 엄흥도가 산마루에서 바라보고 말하기를, ‘청령포에 등불이 환하고 또 무슨 울음소리가 나므로 가봐야겠다’ 하고는 옷을 벗고 강을 건너 곧바로 그 앞에 가서 엎드려서 기침을 하니, 단종께서 울음을 그치고 묻기를 ‘너는 누구이며 깊은 밤에 무엇 때문에 왔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엄흥도가 대답하기를 ‘신은 본군의 호장(戶長)인데 울음소리를 듣고 놀라서 감히 이렇게 달려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단종께서 탄식하여 이르기를 ‘여기에 와서 묵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와서 위로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늘 네가 찾아왔으니 그 정성이 기특하다. 이제야 초야(草野)에도 선인(善人)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이때부터 밤마다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정축년(1457) 10월에 단종께서 세상을 떠나자 수령과 종자(從子)들은 두려워서 감히 염(斂)도 하지 못하였는데 엄흥도는 곧바로 울부짖으면서 관과 이불을 자체로 마련해서 염을 해 가지고 등에 지고 갔으며 선산 안의 산기슭에 자기 손으로 묻었으니, 이곳이 오늘의 장릉(莊陵)입니다.”
작가 이광수는 단종의 ‘슬픈 이야기’를 소설로 옮기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 때문에 의분을 머금고 죽은 이가 사육신을 머리로 하여 백으로써 셀 만하고 세상에 뜻을 끊고 일생을 강개한 눈물로 지낸 이가 생육신을 머리로 하여 천으로써 셀 것이다. 육신의 충분(忠奮)·의열(義烈)은 만고에 꺼짐이 없이 조선 백성의 정신 속에 살 것이요 단종 대왕의 비참한 운명은 영원히 세계 인류의 눈물로 자아내는 비극의 제목이 될 것이다.”
영화가 말해주는 민심의 현주소
이광수의 ‘단종애사’가 217회에 걸쳐서 신문에 연재되고 대단원의 막을 내리자 독후감이 전국 각지에서 잇따라 답지한다. 이 가운데 김필수(金弼秀)라는 이가 아래와 같이 썼다.
“춘원 선생의 붓끝을 거쳐 다시금 폭발되는 정인지(鄭麟趾)와 신숙주(申叔舟)의 거동이 잇새에 신물이 나오도록 싱겁기도 합니다. 한명회 등은 원래부터 그러하거니 오히려 사내자식의 한 광발(狂發)로 볼 수 있거니와 顧命(고명) 받은 정·신으로는 차마 못 할 일이 아닙니까!
그보다도 기가 막힘은 이 기록을 읽는 오늘의 정·신 류의 간사한 모리배가 백주에 태연하고 어두운 밤에 쥐 떼를 지어 충직·직절한 인사들을 털썩털썩 누이는 형적을 이리 저리서 보게 될 때 사육신이 흘려준 붉은 피는 오히려 부족하고 깊은 한이 억만년에 닿은 단종의 마음 쓰리신 한을 그래도 동정할 사회가 와 보지 못하는가 하매 가슴이 초조해지고 입술이 깨물리옵니다.”
월탄 박종화는 나중에 이 ‘단종애사’를 설명하며, 당대의 독자들은 단종에게서 핍박받는 ‘조선인’들을, 수양대군(세조대왕)에게서 ‘일본 제국주의’를 보았다고 했다.
지금 이 나라의 관객들은 단종에게서 누구를 보고, 한명회에게서 누구를 보고, 엄흥도에게서 누구를 보고 있는가?
1453년(단종 1년, 계유년), 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은 누구의 난이던가? 살해당한 고명대신들의 난이던가? 단종의 난이던가? 권력에의 야욕 넘치던 ‘대수양’의 난, 아니었던가?
여론조사를 믿지 않는다. 여론조사기관에서 전화가 오면 서둘러 끊는다. 뜻하지 않게 영화가 민심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이는 산채 권력의 힘으로 가릴 수 없는, 공감하는 힘의 작용이다. ‘깊은 슬픔’, 그 ‘한’의 공동체, 세상이 바로 서기를 염원하는 살아있는 마음들의 공동체다. 무섭고 두렵지 아니한가?

◆ 방민호 교수
문학박사, 서울대 국문과 교수. 계간문학잡지 ‘맥’ 편집주간(2022년~)이자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저서로 ‘연인 심청’(2015), ‘통증의 언어’(2019), ‘한국비평에 다시 묻는다’(2021), 서울문학기행(202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