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 25일 통일부·통일연구원 공동 학술회의 개회사에서 북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호칭하고, 남북관계를 국가 대 국가 개념의 ‘한조(韓朝) 관계’로 언급했다.
정동영 장관이 마이크를 잡고 북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 또박또박 불렀다. 단순한 해프닝이나 외교적 수사가 아니다.
입아프게 떠들 필요도 없이, 대한민국 헌법 제3조는 우리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못 박고 있다. 즉, 북한 정권은 우리 영토 북반부를 무단 점거한 반국가단체다.
국가의 녹을 먹는 장관이 반국가단체를 주권 국가로 공식 승인했다. 이 기괴한 호칭의 공식화는 북한에 대한 얄팍한 구애를 넘어선다. 현 정권 스스로가 대한민국의 헌법을 부정하는 ‘반헌법’ 세력임을 만천하에 자인한 치명적 선언이다.
헌법의 근간을 짓밟은 이들의 낡은 운동권식 낭만은, 급기야 국가 안보마저 장난감으로 취급한다. 오늘 대통령은 대한민국 군사력이 세계 5위라는 점을 들먹였다.
이제 북한의 재래식 군대쯤은 우리 힘으로 압도할 수 있으니 주한미군을 빼고 ‘진정한 자주국방’을 이룩하자는 철없는 소리가 여과 없이 튀어나온다. 화려한 숫자에 취해 동북아시아의 지도를 읽지 못하는 소인배들의 몽상이다.
지구본을 돌려 한반도 주변을 보라. 우리 옆에는 세계 2위 군사 대국 러시아와 3위 중국이 거대한 덩치를 과시하며 팽창을 노리고 있다. 머리 위에는 인민을 굶겨가며 기어코 핵탄두를 움켜쥔 집단이 있다. 5위라는 우리의 재래식 군사력 성적표는 훌륭하지만, 이 살벌한 지정학적 정글 안에서 생존을 보장하는 마법의 방패는 아니다.
주한미군은 단순히 북한의 남침을 막기 위한 휴전선 경비대가 아니다. 거대한 대륙 세력의 팽창을 막아내는 방파제이자, 우리가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도 단기간에 구축할 수 없는 첨단 정보 자산과 핵우산을 제공하는 비대칭 전력이다.
방위비 분담금을 두고 매번 날을 세우지만, 실상 우리는 세계 최강의 군대를 이토록 값싸게 안보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재래식 군사력 5위가 되었다고 미군을 빼자는 것은, 동네 골목대장 한 번 이겼다고 세계 타이틀 매치에 헬멧도 없이 뛰어들겠다는 한심한 객기다.
자주라는 달콤한 환상에 취해, 동맹의 등 뒤에 숨어 평화를 누리면서 입으로는 동맹을 쫓아내려 한다. 적의 국호는 깍듯이 존칭으로 부르면서, 정작 자신이 딛고 선 국가의 헌법은 무참히 짓밟는다. 헌법을 부정하는 자들이 국가의 안보 기둥마저 톱질하고 있다.
안보를 80년대 대자보 수준의 감상으로 대체할 때, 국가가 치러야 할 대가는 문서상의 혼란으로 끝나지 않는다.

◆ 박주현 작가
작곡가, 음악감독, 칼럼니스트, 수필가. 페이스북에서 정치, 시사,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해 수많은 이의 공감을 얻고 있다. 에세이집 ‘폭풍의 바다를 건너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