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박필규 안보칼럼] ‘힘’ 없는 평화와 ‘원칙’ 없는 안보는 전쟁을 부르는 도화선
  • 박필규 편집위원
  • 등록 2026-06-15 12:36:28
기사수정

힘이 뒷받침되지 않은 평화는 적을 향한 구걸이고, 전쟁을 각오하지 않는 평화는 물 위에 떠 있는 부초에 불과하다. [사진=연합뉴스]

26년 전 오늘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과 북의 정상이 마주 앉아 발표했던 6·15남북공동선언이 있었던 날이다. 좌파 진영은 6·15선언이 전쟁을 방지하고 남북 교류의 물꼬를 텄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우파 진영은 돈을 갖다 바치고 노벨상을 산 위장 ‘평화쇼’였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여기서 이 소모적인 논쟁에 힘을 뺄 이유는 없다.   

 

최근 로마 성 바오로 대성당에서 열린 특별 미사에 참석한 李 대통령 역시 6·15 선언을 언급하며 현 상황에서 평화의 불씨를 살려야 함을 역설했다. 그러나 26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가 마주한 남북의 현실은 대화와 협력이 아닌 단절과 대결과 긴장 관계임을 부인할 수 없다. 

 

자유와 평화는 인류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다. 그 본질을 오해하는 순간 재앙이 시작된다. 우리는 그동안 ‘평화’를 단순히 ‘전쟁이 없는 자유의 상태’라는 소극적 개념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상대의 선의에 기대지 않고, 적을 제압하여 자유를 누리는 상태이자, 압도적인 힘으로 평화를 확보하고 지킬 수 있는 ‘능동적 상태’다. 

 

힘이 뒷받침되지 않은 평화는 적을 향한 구걸이고, 전쟁을 각오하지 않는 평화는 물 위에 떠 있는 부초에 불과하다. 평화를 위해 주변의 적과 주적의 눈치를 보면서 아군의 전력을 감축하고 무력화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전쟁을 부른다. ‘올인’하고 난 뒤 기대하던 평화가 무너지는 순간 한반도는 또다시 거대한 전쟁의 장으로 변할 수 있다는 역사의 준엄한 경고를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를 돌아보면, 무모한 평화 정책이 어떻게 국가를 멸망의 길로 인도했는지 알 수 있다. 1973년 체결된 파리 평화협정은 월남 패망의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다. 파리 협정은 ‘평화’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상은 월맹(북베트남)의 적화통일을 위한 항복 문서였다. 

 

평화를 약속했던 월맹은 평화협정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약속을 파기하고 남침을 감행, 대통령의 관저인 ‘독립궁’을 점령했다. 월남은 스스로 군사 역량을 강화하기보다 적과의 협정에 안주하다가 결국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1930년대 영국과 프랑스의 ‘유화 정책’ 또한 평화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억지력을 포기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라는 더 큰 재앙을 불렀다. 냉전기 일부 서방 국가들의 안일한 군축 역시 상대의 야욕을 키웠을 뿐이다. 이처럼 힘의 우위가 전제되지 않은 평화는 역설적으로 전쟁을 부르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시각으로 최근 서두르는 전작권 전환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현실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전작권 전환은 ‘산닭을 주고 죽은 닭을 받는 격’이다. 우리가 누리는 한미동맹이라는 살아있는 억지력을 검증도 되지 않은 자주성이라는 미명 하에 동맹의 힘을 내어주고 군사적 공백을 자초하는 것은 안보 파괴 행위다. 지금 대한민국을 지키는 최후의 마지노선은 한미동맹뿐이다.

 

수사적인 종전 선언과 허상의 평화 담론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미 북한은 스스로를 ‘적대적 2개 국가’로 규정하며 분리 장벽을 완성해가고 있다. 적에게 평화의 언어를 건네는 것은 정치적 품격이 아니라 도발을 부르는 초대장이다. 

 

이제는 평화 정책이 아니라, 적이 감히 도발을 꿈꾸지 못하게 만드는 ‘힘의 우위’ 정책을 검토하고 추진해야 한다. 우리는 대한민국 안보의 세 가지 중심과 원칙을 확립해야 한다. 

 

제1의 안보 원칙은 ‘헌법적 책무인 영토 수호와 국민의 생명 보호’다. 북한의 핵무장 헌법 명시와 ‘적대적 2개 국가론’으로 위태로운 분리주의 도전에 우리는 헌법이 명시한 한반도와 부속 도서 영토론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안보와 통일 정책을 견지해야 한다. 

 

제2의 안보 원칙은 ‘동맹과 함께 통합 억지력의 극대화’다. 동맹을 통해 확보한 절대적 억지력이야말로 우리가 평화를 구걸하지 않아도 될 당당함을 제공한다. 한미동맹을 흔드는 자는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는 반국가세력이자 내부의 적이다. 

 

제3의 안보 원칙은 ‘적대적 현실을 직시하는 전략적 유연성’이다. 적대적 현실에서 적의 눈치를 볼 게 아니라 그들의 의도와 그들이 보유한 물리적·기술적 ‘능력’을 위협으로 정량화하고 대응해야 한다. 데이터에 기반해 최악의 시나리오를 예측하고, 감정적 대응을 배제하며, 국제 정세와 미군의 기능 변화에 따라 대응 수단을 강구하는 전략적 유연성을 강구해야 한다.

 

적의 의도를 선의로 해석하여 북한의 핵무장을 도운 평화 착시 오류에서 벗어나, 적의 ‘능력’을 압도하는 방책으로 적의 기도를 철저히 관리하고 통제해야 한다. 적의 핵능력을 정확히 읽고 국제무대에서 비핵화를 지속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핵으로 위협하는 적에게 환장(換腸)하는 평화가 아니라, 손에 잡히는 안보를 말해야 할 때다. 전쟁의 비극을 겪지 않으려면 자체 핵무장을 주장할 정도의 배짱으로 자체 핵무장에 상응하는 대응 전략 수단을 얻어야 한다. 

 

현 정부의 안보 정책은 예비역의 눈에도 참으로 위태로운 수준이다. 평화의 마술에 걸려 안보 상식과 반대로 가고 있다. 보이지 않는 지령을 따른다는 의심마저 받고 있다. 원론적 평화론을 멈추고, 힘을 갖추는 안보정책으로 전향해야 한다.

 

헌법적 영토와 안보 가치를 지키는 강력한 의지, 한미동맹을 통한 압도적 억지력, 그리고 냉혹한 현실주의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전쟁을 막고, 보이는 중국의 위협을 방치하지 않고 대응하는 군사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위정자와 안보 라인의 실험실이 아니라, 5200만 존엄하고 위대한 국민이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아갈 나라다. 

 



 

◆ 박필규 위원


한미일보 편집위원

육군사관학교 40기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0
좋아요
0
감동이에요
0

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 프로필이미지
    guest2026-06-15 13:48:29

    상대의 선의에 기대는 구걸이 아닌, 압도적인 '힘의 우위'만이 5천만 국민의 생명과 진정한 평화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무거운 주제를 맛깔나게 담았네

정기구독배너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