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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山칼럼ㅣ종북 좌파 80년사] ㉘1987 체제 전환 이후의 혼란
  • 松山 작가
  • 등록 2026-07-08 20: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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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리를 인정하지 못한 패자 의식

평생 숙적 관계였던 김영삼(왼쪽)과 김대중. 이들의 단일화 실패로 1987년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사진=연합뉴스]1987년은 한국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크게 방향을 바꾼 해였다.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4월13일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 조치, 6월9일 연세대생 이한열 최루탄 피격, 6월10일 전국적 시위, 6월29일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의 6·29선언, 10월29일 제6공화국 헌법 공포, 12월16일 제13대 대통령선거가 이어졌다.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 이후 16년 만에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료도 1987년 대선을 “16년 만의 직선제 부활”로 설명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선거는 지역감정, 흑색선전, 폭력, 금권선거가 나타난 선거였다고 평가한다. 민주화의 문은 열렸지만, 그 문을 통과하는 한국 정치는 처음부터 안정되지 않았다.

 

표도 후보도 합쳐지지 않았던 1987


1987년 대선 결과는 숫자로 보면 더 분명하다.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는 828만2738표(36.6%)로 당선되었다. 김영삼 통일민주당 후보는 633만7581표(28.0%), 김대중 평화민주당 후보는 611만3375표(27.1%),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후보는 182만3067표(8.1%)였다. 

 

1987 대선 포스터

김영삼과 김대중의 득표를 합치면 1245만956표(55.1%)였다. 그러나 정치는 산술이 아니다. 표는 합쳐지지 않았고, 후보도 합쳐지지 않았다. 6월 거리에서는 민주화 세력이 하나처럼 보였지만, 12월 투표장에서는 영남·호남·충청·수도권의 표심으로 갈라졌다.

 

여기서 1987년 이후 종북좌파 운동권의 첫 번째 착각이 생겼다. 그들은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으면서도, 직선제 선거의 결과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에게 노태우의 당선은 분명 군부 권위주의 세력의 연장이었다. 물론 그 비판은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제도가 열렸으면 제도 안에서 국민을 설득해야 했다. 선거에서 졌으면 왜 졌는지를 분석해야 했다. 그런데 운동권 일부는 국민의 선택을 자기반성의 계기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민중이 아직 각성하지 못했다” “지역주의가 민의를 왜곡했다” “분단체제가 선거를 지배했다” “미국과 보수세력이 판을 짰다”는 식으로 책임을 외부로 돌렸다. 이것이 “승리를 인정하지 못한 패자 의식”의 출발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은 분명 한국 민주주의의 성취였다. 그러나 1987년 12월 대선 역시 같은 민주주의의 절차였다. 6월의 거리는 국민이고, 12월의 투표장은 국민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거리의 함성은 존중하면서 투표장의 결과는 부정하는 태도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데 종북좌파 운동권은 바로 이 구분을 흐렸다. 자신들이 이긴 순간은 “민중의 승리”라 불렀고, 자신들이 진 순간은 “민중의식의 미성숙”이라 불렀다. 이 논리는 이후 한국 좌파 정치문화에 오래 남았다. 이기면 민주주의, 지면 음모. 이기면 국민의 선택, 지면 보수언론의 조작. 이기면 민심, 지면 지역주의. 이런 사고방식은 1987년 대선 패배 이후 더욱 노골화되었다.

 

폭로, 청문회, 거리동원, 이념투쟁의 시대


1988년 2월25일 노태우 정부가 출범했다. 이것이 제6공화국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출범 직후 정국은 안정되지 않았다.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이 선거를 1987년 대선에 이은 “‘1노 3김’의 제2차 대결”로 설명한다.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 부인 김옥숙 여사와 함께 참석한 노태우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민주정의당은 원내 과반 확보에 실패했고,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강한 야권 세력으로 등장했다. 제13대 총선은 대통령선거 불과 4개월 뒤 치러졌고, 노태우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여소야대 국회를 상대해야 했다.

 

이 여소야대는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대통령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던 시대에서 국회가 권력 견제의 무대로 올라온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혼란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제도정치가 성숙한 토론과 타협으로 가기보다 폭로, 청문회, 거리동원, 이념투쟁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1988년 국회는 5공 청산, 광주 문제, 언론 통제, 군부 정치의 책임을 추궁하는 공간이 되었다. 문제는 이 과정이 자유민주주의의 제도 정착보다 “체제 전체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방식으로 소비되었다는 데 있었다.

 

종북좌파 운동권은 이 틈을 파고들었다. 그들은 노태우 정부를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자체를 “분단체제” “외세 종속체제” “반민중 체제”로 규정했다. 여기서 일반 민주화 세력과 종북좌파의 차이가 갈라진다. 

 

일반 민주화 세력은 권위주의 정부를 비판하며 헌정질서의 정상화를 요구했다. 반면 종북좌파는 헌정질서 자체를 불완전한 껍데기로 보았다. 그들에게 1987년 체제는 완성된 민주주의가 아니라 “혁명 이전의 과도기”였다. 대통령 직선제, 국회의원선거, 정당정치, 언론 자유의 확대는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거 민주주의보다 거리의 동원 정치를 더 신뢰했다.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벌어진 노동자 대투쟁도 이 혼란을 키운 중요한 배경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987년 노동쟁의 3749건 가운데 3341건이 7월부터 9월 사이에 발생했다. 

 

1987년 12월 말 노동조합 수는 4103개로, 1986년 2675개보다 크게 늘었다. 조합원 수도 1986년 103만5890명에서 1987년 126만7457명으로 증가했다. KDI 경제정보센터 자료도 1987년 7~9월 석 달간의 파업 건수가 이전 10년간 파업 건수의 2배였고, 참가자 수는 이전 10년간 참가자 수의 5배였다고 설명한다.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노동조건 개선, 노동3권 보장 요구는 정당한 면이 있었다. 문제는 그 정당한 요구가 일부 급진 운동권에 의해 반체제 투쟁의 재료로 소비되었다는 점이다. 

 

울산, 창원, 마산, 부산, 인천, 구로, 성남, 안산, 부천 등 산업도시와 공단 지역에서 노동현장은 정치투쟁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대우조선, 한진중공업, 구로공단, 부평공단 같은 산업 현장은 단순한 노사 갈등의 공간을 넘어 이념투쟁의 현장으로 변했다. 

 

노동자의 임금 문제는 “민중해방”의 구호와 결합했고, 작업장 민주화는 “반미자주”와 “분단체제 타파”의 언어로 확장되었다. 이것이 1987년 이후 종북좌파가 노동운동 안으로 들어간 방식이었다.

 

이 시기 운동권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1987년 대선에서 졌지만, 자신들이 역사적으로는 이겼다고 믿었다. 이것이 더 위험했다. 선거에서는 졌지만 거리에서는 이겼다. 권력은 잡지 못했지만 시대정신은 자신들에게 있다. 국민 다수는 아직 자신들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역사의 방향은 자신들에게 있다. 

 

이런 의식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혁명가의 자기 확신에 불과하다. 선거 결과보다 “역사의 법칙”을 더 믿고, 국민의 판단보다 “민중의 잠재의식”을 더 믿는 순간, 정치는 현실을 떠난다. 종북좌파 운동권은 바로 그 길로 들어갔다.

 

자유를 이용해 자유민주주의를 공격하다


1987년 체제 전환 이후 혼란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한국은 권위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동권 일부는 그 자유를 이용해 자유민주주의를 공격했다. 

 

검열이 약해지자 반미 구호가 커졌다. 학생운동의 공간이 넓어지자 북한식 민족주의가 대학가에 번졌다. 노동운동이 성장하자 계급투쟁 언어가 현장에 들어갔다. 국회 청문회가 열리자 권력 감시보다 체제 부정의 정서가 커졌다. 민주화는 자유의 확대였지만, 그 자유의 틈으로 자유를 부정하는 세력도 합법 공간에 들어왔다.

 

따라서 1987년은 두 얼굴의 해였다. 하나는 대통령 직선제 부활과 제6공화국 출범의 해였다. 다른 하나는 종북좌파가 합법 정치공간, 대학가, 노동현장, 시민사회 안으로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해였다. 

 

1987년 이전의 운동권은 주로 독재 반대의 이름으로 자신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1987년 이후에는 더 이상 그 이름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제도 민주주의가 열렸기 때문이다. 그때 운동권은 선택해야 했다. 자유민주주의 안으로 들어올 것인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혁명 노선을 계속 붙들 것인가? 종북좌파는 후자를 택했다.

 

그 결과 1987년 이후 한국 정치에는 이상한 구조가 생겼다. 제도는 민주화되었는데 정치언어는 계속 전시체제에 머물렀다. 대통령은 직선으로 뽑혔는데 정부는 여전히 “정권 타도”의 대상이었다. 국회가 열렸는데 거리는 여전히 최종 심판자처럼 행동했다. 언론 자유가 확대되었는데 음모론과 선동도 함께 커졌다. 노동권이 확장되었는데 노동운동 일부는 대한민국 체제 비판의 통로가 되었다. 

 

이것이 1987년 체제 전환 이후의 혼란이었다. 그리고 그 혼란의 한복판에, 승리를 인정하지 못하고 패배를 혁명론으로 바꾼 종북좌파 운동권이 있었다.





◆ 松山 정광제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펴냈다. 松山(송산)은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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