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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현 작가칼럼] 스페인의 연좌제, 영국의 망각법, 그리고 2026년 한국
  • 박주현 작가
  • 등록 2026-08-15 00: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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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우리는 중세 스페인의 종교재판소가 아니라 17세기 영국의 망각법을 택했기에 오늘날의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3류 국가로 전락한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전(왼쪽)과 망각을 통해 국가 번영의 기틀을 다진 영국 찰스 2세. 그런데 2026년의 한국은? 

프란시스코 타레가의 기타 독주곡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을 듣다 보면, 쉴 새 없이 현을 퉁기는 처연한 트레몰로 주법이 마치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방울처럼 가슴을 친다. 

사람들은 이 서글픈 선율을 두고 기독교 세력에 쫓겨나야 했던 이슬람 왕조의 비애라 여긴다. 하지만 역사의 냉혹한 궤적으로 그 시대를 복기해 보면, 이 처연한 눈물의 진짜 주인은 다름 아닌 승리자였던 스페인 제국 자신이다. 

알람브라 궁전을 차지한 직후 스페인이 꺼내 든 광기 어린 ‘끝없는 과거와의 싸움’이, 결국 해가 지지 않던 제국의 숨통을 스스로 끊어버린 치명적인 자해극의 서막이었기 때문이다.

15세기 말, 무적함대와 신대륙의 막대한 은을 손에 쥐었던 스페인이 처참하게 몰락한 결정적 원인은 ‘피의 순결성(Limpieza de sangre)’이라는 기괴한 연좌제법이었다. 

관직을 얻거나 대학에 가려면, 자신의 4대조 조상 중에 살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나 무슬림이 없음을 족보로 증명해야만 했다. 

사람들은 서로의 조상을 뒤지며 밀고했고, 국가를 지탱하던 최고의 금융가와 행정 관료, 과학자와 예술가들이 단지 핏줄과 과거 행적 때문에 하루아침에 재산을 빼앗기고 추방당했다. 

막대한 부가 유입되었음에도 이를 운용할 엘리트들을 스스로 멸종시킨 스페인은 거듭된 파산을 겪으며 3류 국가로 굴러떨어졌다. 조상의 족보를 파헤쳐 현재의 역량을 처형한 미개한 과거 집착증이 제국의 근육을 녹여버린 것이다.

반면 17세기 영국은 스페인과 정확히 반대의 길을 걸으며 대영제국의 기틀을 닦았다.

1660년, 아버지 찰스 1세의 목을 쳤던 크롬웰의 공화국 시대가 무너지고 아들 찰스 2세가 왕정복고를 통해 왕좌로 돌아왔다. 

서슬 퍼런 피의 보복이 불어닥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찰스 2세가 즉위 직후 통과시킨 것은 ‘면책과 망각법(Act of Oblivion)’이었다. 

아버지의 사형 집행 문서에 직접 서명한 극소수만 처벌했을 뿐, 지난 11년간 공화국 체제에 부역했던 모든 신하와 시민들의 행적을 법적으로 영원히 망각해 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거대한 역사의 격랑 속에서 그저 살아남기 위해 체제에 순응했던 평범한 엘리트들을 모조리 단두대에 세우고서는 텅 빈 국가를 재건할 수 없다는 서늘한 리얼리즘이었다. 

조상의 이념이나 과거의 부역을 묻지 않고 오직 현재의 능력만을 취한 이 위대한 ‘망각’ 덕분에, 영국은 세계의 패권국으로 도약했다.

광복과 6·25전쟁이라는 참혹한 폐허 위에서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식민 치하 36년이라는 끔찍하게 긴 시간 속에서, 그저 소극적으로 시대에 적응해 생존을 도모했던 엘리트와 민초들의 역량을 내치지 않고 국가 재건에 온전히 쏟아부을 수 있게 한 근대적 관용 덕분이었다. 

우리는 중세 스페인의 종교재판소가 아니라 17세기 영국의 망각법을 택했기에 오늘날의 번영을 누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2026년 8월, 대한민국의 인터넷 광장과 공권력은 17세기 영국의 위대한 망각을 내다 버린 채 15세기 스페인의 야만적인 이단 심문소로 완벽하게 퇴행했다. 우리는 지금 미래를 창조하는 대신 ‘끝없는 과거와의 싸움’에 국가적 에너지를 탕진하고 있다.

최근 한 여배우가 4대째 의사 가문이라 밝혔다가, 100여 년 전 증조부의 친일 이력 때문에 하루아침에 광고가 잘리고 방송이 삭제되는 십자포화를 맞았다. 

증조부의 친일 이력으로 연좌제 처벌 논란에 직면한 배우 하영. [KBS 2TV ‘옥탑방의 문제아들’ 캡처]

2026년의 대중들이 15세기 스페인의 순혈주의자들처럼 100년 전 조상의 족보를 캐내어 30대 청년의 밥줄을 끊어버리는 이 핏줄 파시즘에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괴한 과거 집착증은 대중의 마녀사냥을 넘어 국가 공권력마저 중세의 종교경찰로 전락시켰다. 얼마 전 경찰은 스타벅스 코리아 본사에 수사관들을 대거 투입해 압수수색을 벌였다는 소식을 전했다. 

기업이 진행한 텀블러 할인 행사 명칭이 ‘탱크데이’였고 홍보 문구가 불순하다는 이유로, 기업의 일상적 마케팅을 역사 모욕죄로 엮어 사상 검증의 단두대에 올린 것이다. 

100년 전 증조부의 족보를 캐내어 청년의 밥줄을 끊고, 과거의 성역을 건드렸다는 혐의로 글로벌기업의 한국 본사를 털어버리는 이 숨 막히는 광경은 대한민국이 스스로 이성과 미래의 숨통을 끊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증명한다.

가족이나 조상이 아닌 개인의 행위만을 처벌한다는 자기 책임의 원칙과 연좌제 금지는 피의 혁명을 거쳐 인류가 쟁취한 근대성의 성취다. 

과거의 역사적 상처와 족보를 핑계 삼아 현재를 살아가는 개인을 옥죄는 이 건조한 합의가 무너지는 순간, 사회는 사상 검증을 일삼던 미개한 봉건 제국으로 회귀한다. 

끝없는 과거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영원히 증오만을 상속하며 자멸하는 야만의 수용소로 남을 뿐이다. 귓가에 맴도는 알람브라 궁전의 처연한 선율이, 스페인의 몰락을 맹렬히 좇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서늘한 미래를 조문하고 있다.


◆ 박주현 작가

작곡가, 음악감독, 칼럼니스트, 수필가. 페이스북에서 정치, 시사,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해 수많은 이의 공감을 얻고 있다. 에세이집 ‘폭풍의 바다를 건너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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