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27일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신뢰’와 ‘정당 내 신의’를 강조했다. 오른쪽은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와 부산 북갑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한동훈 의원. [사진=한미일보 그래픽]
박근혜 전 대통령을 다시 정치의 중심으로 불러낸 것은 박근혜 자신이 아니었다. 2016년 국정농단 사태 속에서 보수정권의 내부 방어선을 무너뜨렸던 정치의 방식이 이름만 바꿔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다.
14년 만에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 참석한 박 전 대통령은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라며 “정당 내 신의가 없으면 그 정당은 존립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밖의 적보다 내부 분열이 더 무섭다며 지도부를 중심으로 단결할 것도 주문했다.
의례적인 덕담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박근혜의 정치적 이력과 현재 국민의힘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을 겹쳐보면 의미가 달라진다. 자신을 믿고 선택한 당원과 동료를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가. 자신의 선택이 낳은 결과에 어떤 책임을 졌는가. 박 전 대통령은 중도·분권·상향식 공천이라는 제도적 언어보다 먼저 정치의 자격을 물었다.
부산에서 먼저 드러난 박근혜의 선택
박근혜의 재등장은 연찬회에서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지난 6·3 지방선거가 출발점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대구와 충청, 강원, 울산, 경남, 부산을 돌며 국민의힘 후보들을 지원했다. 특히 5월 27일 부산 기장시장에서는 박형준 부산시장 후보와 함께 부산 북갑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국민의힘 박민식 후보의 지지를 직접 호소했다.
박민식의 경쟁자는 국민의힘에서 제명된 뒤 무소속으로 출마한 한동훈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한동훈을 거명하지 않았지만 한동훈의 경쟁자 손을 잡았다. 현장 일부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한동훈 보고 있나” “한동훈 잡아라”는 구호까지 나왔다.
부산은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의 정치적 본거지다. 김 전 대표는 장동혁 대표에게 한동훈·유승민·이준석과 통합하라고 요구했고, 한동훈이 부산 북갑에서 승리하자 “한동훈만이 해낼 수 있는 쾌거”라고 평가했다.
한동훈은 이후 김무성의 대표적인 정치 브랜드였던 상향식 공천을 보수 재건의 핵심 의제로 꺼냈다. 박근혜의 부산 유세는 결과적으로 한동훈을 직접 압박했고, 그 정치적 메시지는 한동훈을 앞세워 부산과 국민의힘에 다시 진입하려는 김무성식 비박 정치에까지 향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일보가 문을 열고 김무성이 방어선 허물었다
현재의 움직임을 이해하려면 2016년 탄핵으로 돌아가야 한다.
TV조선은 안종범 청와대 수석의 미르·K스포츠재단 모금 개입 의혹을 처음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한겨레는 재단의 실질적 배후로 최순실을 실명 보도했고, JTBC의 태블릿PC 보도는 대통령 연설문 사전 유출이라는 물증을 제시했다.
박 대통령이 최순실에게 연설문 등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고 인정한 다음 날 조선일보는 사설 제목을 한마디로 뽑았다. ‘부끄럽다’였다. 이후 조선일보는 2선 후퇴와 조기 퇴진을 요구하다 탄핵을 불가피한 헌법 절차로 받아들였다. 보수 유권자와 새누리당 의원들이 현직 보수 대통령에게서 이탈할 명분을 제공한 것이다.
그 여론을 집권당 내부의 탄핵 찬성표로 전환한 핵심 인물은 김무성이었다. 박근혜 대선 캠프 총괄본부장이었던 김 전 대표는 2016년 11월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탄핵소추안은 찬성 234표로 가결됐다. 야당과 무소속 의석만으로는 통과가 불가능했다. 새누리당에서 최대 62표가 넘어온 것으로 추산됐다. 김무성이 혼자 탄핵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가 비박계의 문을 열지 않았다면 국회 가결 역시 어려웠다.
조선일보가 보수층의 방어막을 걷어냈고 김무성이 새누리당의 방어선을 허문 셈이다.
이름만 바꿔 다시 나타난 세 가지 언어
10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구도가 다른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고 있다.
김무성은 한동훈을 끌어안으라고 요구한다. 조선일보는 한동훈 제명을 ‘비정상’이라고 비판하며 장동혁 지도부를 압박한다. 한동훈은 공천권을 당대표가 아닌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며 보수 텃밭의 80~90%를 상향식 공천으로 정하자고 주장한다.
세 주체가 하나의 지휘체계 아래 움직인다는 증거는 없다. 여기서 말하는 연결은 조직적 공모가 아니라 의제와 정치적 이해가 같은 방향으로 수렴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공통분모는 중도 확장, 분권형 개헌, 상향식 공천이다.
중도는 본래 민생이어야 한다.
물가와 일자리, 주거와 교육, 치안과 안보를 해결하는 능력으로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중도가 특정 세력의 복귀를 위한 배제의 언어로 사용되면 선거 레토릭으로 변한다. 탄핵 책임을 물으면 강경 보수, 당원 중심 정당을 주장하면 극단으로 몰아가는 방식이다.
분권도 누구에게 권력을 주느냐가 핵심이다.
대통령의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은 민주적 분권이다. 그러나 국민주권을 강화할 장치 없이 권한을 국회와 정당, 원내 중진에게 이전하는 데 그친다면 정치 엘리트의 권력 확대로 귀결될 수 있다. 권력이 여러 세력으로 나뉠수록 정치인을 부각하고 여론의 방향을 정하는 대형 언론의 영향력도 커진다.
상향식 공천 역시 당원 주권이 빠지면 레토릭에 불과하다.
진정한 상향식 정당이라면 총선 후보보다 먼저 당협위원장을 당원이 직접 뽑아야 한다. 당협위원장 직선제는 반대하면서 총선 후보만 일반 국민 여론조사로 결정하자고 하면 현역 의원과 유명 정치인, 언론 노출이 많은 인물에게 유리해진다.
그것은 당원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제도가 아니라 기득권을 ‘국민 선택’으로 포장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
박근혜가 ‘신뢰’를 꺼낸 이유
바로 이 지점에서 박근혜가 꺼낸 ‘신뢰’가 세 가지 언어의 허점을 찌른다.
김무성은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앞장섰다가 탄핵에도 앞장섰다. 보수정권이 무너지고 당이 분열된 결과에 대해 어떤 책임을 졌는지 답해야 한다.
한동훈은 윤석열 정부의 법무부 장관이었고 윤석열에 의해 집권당 지도자로 올라섰다. 새로운 보수의 대표자를 자처하기에 앞서 자신이 참여한 정권의 성패에 어떤 공동책임을 졌는지 설명해야 한다.
조선일보도 보수정권의 탄생과 몰락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자신이 만든 여론과 정치적 결과에 대해서는 선출된 권력처럼 책임지지 않는다.
박근혜의 발언을 탄핵 심판의 법적 결론을 뒤집자는 주장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그것과 별개로 권력을 선택하고 움직인 사람들이 그 결과에 어떤 책임을 졌는지는 물을 수 있다.
신뢰는 말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공동체가 어려울 때 자리를 지키는 희생, 자신의 선택이 실패했을 때 먼저 책임지는 태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한 기준을 자신에게도 적용하는 일관성으로 증명된다.
중도는 민생으로 증명해야 한다. 분권은 국민에게 권력을 돌려줄 때 정당하다. 상향식 공천은 당원 주권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조건이 빠지면 중도는 특정 세력의 복귀 명분이 되고, 분권은 국회와 언론의 권력 확대가 되며, 상향식 공천은 기득권을 가리는 포장지가 된다.
박근혜는 김무성도, 한동훈도, 조선일보도 거론하지 않았다. 다만 정당 안에 신의가 없으면 그 정당은 존립할 수 없다고 했다.
민주주의는 선택할 권리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자신이 한 선택의 결과를 감당할 책임이 있어야 한다. 제도가 아무리 민주적으로 보이더라도 희생과 책임이 없다면 권력투쟁의 포장에 불과하다.
박근혜를 다시 정치의 중앙으로 호출한 것은 과거에 대한 미련도, 친박의 부활도 아니었다.
희생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으면서 다음 권력만 요구하는, 이름만 바꿔 돌아온 ‘배신의 정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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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돼지다. 돼지는 어차피 잡아먹히기 위해 있는 것이다” 라는 말은 200년도 더 전인 1789년의 프랑스 칠월혁명 직전에 프랑스 귀족들이 자기나라 국민들을 가리켜 하던 말이었다고 들었다.
그 당시 프랑스 인구 중 5%나 겨우 될가말가 한 백만 남짓한 귀족들이 국토의 90%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다니 農奴등 일반 서민들의 생활의 비참한 실상을 능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결국 왕과 귀족등 지배계급의 폭정에 견디다 못한 그 개돼지들이 들고 일어나 왕과 왕비는 물론 프랑스의 귀족이란 귀족은 모조리 데려다가 목을 잘랐다.
오죽하면 당시 “프랑스에서 가발 값이 폭락했다”는 농담이 다 생겼겠는가? 귀족들의 모가지가 모두 날아가서 가발을 씌울 대갈통이 남아있지를 않았던 것이었다.
그후 국민은 개돼지로 취급해도 그만이라는 말은 유럽과 미국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그로부터 200년이 넘은 21세기에 지구를 반바퀴 돌아 대한민국에서 이 말이 부활했다.
김대중이란 자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부터 20년이 지나는 동안 대한민국 의 정치인들이 점차로 민심을 두려워하지 않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한국의 상류사회에서 “국민들을 개돼지로 취급해도 된다”는 말이 다 생겨날 정도가 된 것이다.
그리고 한국 상류사회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지난 2017년 3월 10일에 있었던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대한 인용판결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 한국의 상류사회란 정계(국회), 사법계, 언론계, 그리고 민노총과 전교조를 의미한다.
이들의 숫자는 전체인구의 5% 쯤 되어 보이지만 사회 각계의 권력의 100%를 이들이 장악하고 있고 이들을 대변한다는 소위 촛불 민심은 인구의 95%를 차지하는 개돼지들의 태극기 민심을 완전히 압도하고도 남는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시위자들이 휘두르는 태극기의 물결이 서울은 물론 온 전국 주요도시의 거리를 뒤덮었어도 언론은 술이나 얻어 먹으려고 나타난 구경꾼들까지 합쳐도 겨우 천명이나 모이는 촛불집회만 과장되게 보도했고 태극기 국민 대회는 철저히 외면했었다.
헌재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서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인용하는 판결문을 만장일치로 선택했던 것이다.
한국의 상류사회 인간들에겐 개돼지들의 민심은 민심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헌재라고 해서 위법적인 판결을 아무렇게나 내려도 되는 무한의 권한을 위임받은 기관은 아니다.
국민 누구나 불법적인 법 집행에는 승복할 의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개돼지들은 개돼지들 답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그래서 그 때부터 대한민국은 문자 그대로 완전 無法天地가 되고 말았다.
법이 보장하는 합법적인 반대의견이 위법적인 사법권 남용에 제지를 당하는것이 현 한국사회의 현실이 된 것이다.
그런데 어차피 법이 살아있지 않은 세상이라면 개돼지들도 다같이 들고 일어나 쇠파이프와 화염병으로 진압경찰들의 해골바가지를 까부시고 청와대와 국회와 법원으로 쳐들어가 모조리 다 때려죽인 후 박근혜 대통령 탄핵인용 판결같은 것은 그냥 깔아 뭉게버렸으면 그만일 것이었을 것이다.
1789년 7월 14일에 프랑스에서 성난 국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으로 쳐들어가 그곳을 지키는 군인들을 내 쫓고 그곳에 있던 무기들을 탈취해서 무능한 부르봉 왕정을 뒤엎고 부패한 귀족들을 단두대로 끌어다가 모조리 목을 잘랐던 프랑스 혁명이 바로 이러한 쾌거 아니었나?
그러나 21세기의 한국의 개돼지들은 내 몸 다치기 싫어서 침묵으로 일관했고 그 동안에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을 당한 위에다가 말도 안되는 죄목까지 덮어쓰고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 모든 일을 기획하고 밀어붙여 나라가 빨갱이들에게 넘어가도록 만든 자들은 빨갱이들이 아니라 그 간에 보수우익을 자처하면서 해방후 내내 권력의 단물을 빨아먹어오던 자들이었다.
이들 모두가 일제때부터 친일과 좌익과 우익으로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해가며 기득권을 누려온 소위 명문 대갓집 인간들이니 자기들이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이었지만 겁이나서 못해내던 북한 길들이기를 척척 해내는 박근혜가 얼마나 아니꼽고 눈에 가시같았겠는가? 그러니 박근혜를 탄핵하고 없는 죄를 만들어 뒤집어씌워 감옥에 가두어 놓은 후 좋아서 해해거리면서 이제 대한민국이 북한이나 중공에 먹히게 되면 이미 외국 은행에 감춰놓은 재산이나 챙겨가지고 미국이나 호주같은 곳으로 튈 생각들이나 하고들 자빠졌는 게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엘리뜨라는 자들의 멘탈리티의 현 주소인 것이다.
예를 들어 박근혜 탄핵난동이 한창일 때 이X창이란 늙은이가 탄핵의 주역 유승민을 찾아가 그의 손을 잡고 했던 짓들을 기억할 것이다. 이 늙은이는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도 후진들로부터 사람을 소개받으면 “음, 그래 자넨 몇회인가?” 하면서 자기 고등학교 후배인지 아닌지부터 먼저 확인하려들더라는 목격담을 들은 일이 있다.
이 늙은이가 속해있는 수구꼴통 기득권층들에게도 역시 못배우고 뼈대없는 집안의 인간들은 그저 개돼지일 뿐 국민으로서의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한국의 중국 속령화는 바로 이 늙은이가 속해있는 고등학교 學閥 동아리에서 행하고 있는 거대 프로젝트이며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서 시작해서 이재명의 등장까지 모든 사건사고들이 모두가 이들의 작품인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수꼴 사탄파들의 음모에 의해 강제로 끌어 내려져 청와대를 떠난 후 팔년이 지난 지금 그 때의 일이 반복되려 하고 있다.
올 삼일절 날에 광화문 광장에서 부터 시작해서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까지 사실상 서울 중심가 일대를 완전히 채우다시피 했던 윤석렬 대통령에 대한 탄핵반대의 시위군중의 숫자는 육백만이 넘었다고 하지만 이재명과 권영세 등 국회 여야 양대 정당의 인간들과 이들의 꼬붕인 헌법재판소 판사란 자들에게는 그저 어차피 잡아 먹혀야 할 개 돼지들의 꿀꿀대는 모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는지18세기까지 유럽 귀족사회에서 유행했던 “국민 개되지론”은 서쪽 산으로 졌다가 동쪽 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진리를 따라 이제 동아시아의 小中華 東方禮儀之國에서 되 살아 나고 있는 것이다.
육백만 개돼지들이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을 허공에다 대고 아무리 외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 이후 일어 난 일련의 사건들은 결국 이재명이라는 희세의 범죄자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온 세상을 떠들썩 하게 하면서 국격을 완전히 똥무더기 속에 파 묻히게 하고 있는데도 개 돼지들의 아우성 소리만 요란할 뿐 소위 사람으로 취급을 받는 다는 자들 중에서는 누구 하나 감히 나서서 바른 말 한마디 하는 자가 없는 세상이 되 버렸다.
개돼지 오천만이 모두 길거리에 나와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을 허공에다 대고 “가짜 대통령”이라는 구호를 아무리 천번 만번 외쳐 본들 평생을 쇠파이프와 사시미 칼이 난무하는 범죄세계의 핏물에 손발을 담그고 살아온 이재명과 그 똘마니들이 자기들 몸에 물리적인 폭력이 와 닿기 전에 외약짝 눈 하나 깜박일 것이라고 보여지는가?
이제 모든 일은 끝났으니 그저 이 과도기적인 격동의 시기가 지나가기만 기다리는 외에는 도리가 없어보인다. 21세기인 지금도 대한민국의 소위 상류층 사람들에게 개돼지로 취급당하면서도 아뭇소리 못하고 사는 불쌍한 민초들을 위로 하려해도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감나무 밑에서 위를 향하고 입을 벌린채 풍찬노숙을 하면서 기다리면 새똥묻은 감이라도 한개쯤 입에 떨어질 날이 오듯이 暴君이나 暗君의 자손 중에 언젠가 이조때의 세종대왕이나 청나라의 강희제같은 聖君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김정은이나 이재명의 증손자 世代에 가서 박정희나 박근혜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사항적인 기대만을 안은채 여생을 보내다 눈을 감는 게 우리 한심한 세대의 운명인가 보다.
대한민국의 마지막 대통령이셨던 박근혜 대통령에게 한 말씀 올린 후 홍난파의 유명한 가곡 “ 봉선화”를 그 분께 불러 드리고 끝내련다.
불운하지만 위대하신 박근혜 대통령님, 당신은 이제 도적떼들의 모함에 의해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셨던 대한민국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려 하고 게십니다.
그러나 당신이 사라진 자리에서 당신이 남긴 그 깃발을 차지하기 위해서 우리 민족사에 있어본 일이 없는 처절한 싸움이 당신을 미워하여 당신을 끌어내린 바로 그 장본인들 간에 일어날 것입니다.
훗날 세계의 역사가들이 당신을 이 같이 평할 것입니다.
“15세기에 프랑스에서 살다가 죽었던 쟌다크가 20세기에 지구 반대편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대통령 박근혜로 환생했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 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 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 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엄동설한 찬 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아름다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 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https://www.youtube.com/watch?v=d0ElJJ1xu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