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박정희, 전두환, 윤석열 대통령.
안보 관련 역사 해석은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자의적 유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누가 먼저 역사적 악행을 시도했는지를 살피는 인류 보편적 이성과, 어떤 해악을 끼쳤는지 규명하는 엄정한 실증적 바탕과 역사 윤리라는 객관적 기준 위에서 올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 객관적 기준을 이탈할 때, 역사는 과학이 아닌 정치적 권력의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이재명은 8월5일 국무회의에서 “육사가 그동안 세 차례의 쿠데타를 일으킨 주체인데 한 번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특정 군종이 군대를 장악하고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뒤 책임을 면하는 구조를 바꾸기 위해 사관학교 통합을 추진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육사 매도는 호국 전통에 대한 선전포고
육사를 쿠데타 집단으로 매도한 것은 육사 폐교를 위한 적대감과 혐오감 표출이며, 80년 피로 지킨 호국 전통에 대한 명예훼손이자 안보 세력에 대한 선전포고다.
육사는 6·25전쟁, 베트남 전쟁, 각종 대침투 작전에서 국가를 지키려고 1758여 명(전사자 1476명, 순직자 282명)이 희생한 헌신적 육사다. 육사를 쿠데타 집단으로 엮는 억울한 오명을 벗기기 위해 쿠데타라고 칭하는 역사적 사건의 정명(正名)부터 밝힌다.
5·16은 세계 역사에서 보기 드문 성공한 혁명이었다. 5·16혁명은 동남아와 남미, 아프리카의 단순 정권 찬탈 쿠데타와 질과 성격이 아주 다르다.
혼란과 빈곤과 무질서 속에서 침몰하던 대한민국을 건져 올리기 위해 불가피하게 단행된 근대화의 출발점이자 국가 탈바꿈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기틀을 닦은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해야 한다.
12·12는 대통령 시해 패륜(悖倫) 세력의 진압작전이며, 12·3은 집권 세력에 의한 쿠데타(내란)가 아니라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한 비상계엄이다. 좌파(사관)에 의해 확고하게 ‘군사반란’ 쿠데타로 명명된 12·12부터 진실의 일부를 규명하고자 한다.
1. 12·12는 정권 찬탈이 아닌 대통령 시해 세력 제압작전
12·12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계추를 1979년 10월26일로 되돌려야 한다. 대한민국은 국가 원수가 부하의 총탄에 시해되는 전대미문의 헌정사상 최대의 비극을 맞았다.
대통령 시해라는 충격적인 사건은 대한민국을 거대한 안보 공백 상태로 밀어 넣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가 살해당한 초유의 사태 속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범죄 세력의 색출과 군 통수권의 정상화였다.
신군부가 내세운 명분은 명확했다. 대통령을 시해한 패륜적 범죄 집단과 그 동조 세력을 응징하고 국가 안정을 되찾는 것이었다. 실제로 김재규는 이후 재판을 통해 법적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실행 당시에는 치안 유지와 국가 수호를 위한 ‘긴급 구국 조치’였다는 강력한 정당화 논리가 수긍(首肯)되었고 작동했다.
2. 역사적 진실을 거세한 1997년 대법원 판결
1981년 군검찰과 법원은 10·26 이후 벌어진 일련의 수습 과정인 12·12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 과정의 우발적 충돌 혹은 수사 편의를 위한 조치로 보았으며, 신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란’이라는 언급조차 없었고 기소유예나 선고유예 등의 조치를 취하며 사실상 12·12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1997년 대법원은 판결에서 일방적으로 ‘군사반란’으로 규정했다. 당시 사법부는 혼란의 실체가 김재규로부터 시작된 것을 분별하지 못했거나 분별을 했더라도 정치적 압박에 못 이겨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한 신군부가 혼란의 주체처럼 뒤집어씌운 것은 정치적 수사와 재판에 불과했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범죄 수사를 주도해야 할 당시 합수부가 시해범 김재규의 영향력 아래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방조하는 듯한 군 지도부의 정황을 포착한 상황에서, 국가의 근간을 지키기 위한 군 내 세력의 결단은 불가피했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그러나 문민정부 출범 이후 검찰과 사법부가 12·12를 ‘군사반란’으로 규정하면서 당시의 복잡한 정치·군사적 맥락이 배제된 채 사법적 잣대로 재단되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제15대 총선(1996년 4월11일) 결과 집권 여당인 신한국당은 원내 1당을 차지했으나 과반 의석 확보에는 실패하여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치권의 역학 구도와 여론의 흐름 속에 12·12사건은 역사적 재평가의 대상이 되었고, 사법적 심판 과정을 거치며 ‘군사반란’으로 최종 단죄되었다.
3. 12·12사건과 터키·이집트 군사 개입의 유사성
12·12사건을 1960년 터키의 군사 개입이나 2013년 이집트의 군사 개입과 나란히 놓는 것은, 당시 대한민국이 직면했던 극단적인 안보 위기와 권력 공백의 특수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10·26사태로 대통령이 시해된 국가적 비상사태 속에서 범죄 수사를 주도해야 할 합동수사본부마저 수사 지연과 방조 정황을 드러내던 당시의 정황은,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는 치명적인 위기 상황이었다.
터키 군부가 민주당 정권의 혼란 속에서 헌정 수호를 명목으로 일어섰고 이집트 군부가 국가적 파국을 막기 위해 개입했듯이, 12·12 당시 군 내 세력의 결단 역시 국가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자위적 조치이자 안보적 선택이라는 시각이 존재한다.
진정한 역사 평가는 결과의 유무를 넘어 국가 존립이 위태로웠던 당시의 복합적인 위기 상황과 구조적 요인을 입체적으로 조명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4. 12·12사건과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초기의 군사 대응
12·12사건을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초기의 군사 대응과 비교하는 것은, 국가가 전례 없는 생존의 기로에 섰을 때 군이 취할 수밖에 없는 비상적 조치의 불가피성을 조명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당시 이스라엘군이 신생국의 건국 과정에서 내부의 혼란과 외부의 위협에 맞서 통신과 지휘 계통을 신속히 장악하고 국가의 생존을 지켜냈듯이, 10·26사태라는 미증유의 대통령 유고와 권력 공백 속에서 합수부가 12·12에서 지휘 계통을 장악하고 내부 혼란을 통제한 것은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국가 기능을 회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고도의 작전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국민이 이해해야 할 진실은 명백하다.
12·12는 단순한 ‘군이 권력을 잡기 위한 반란’이 아니었다. 국가 최고 지도자를 살해한 패륜적 범죄 세력과 그 동조 세력을 규명하고, 국가의 붕괴를 막기 위해 군이 단행한 결단이었다.
이제 우리는 1997년의 정치적·사법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당시의 엄혹했던 역사적 진실을 객관적인 눈으로 직시해야 한다. 12·12는 쿠데타가 아니라 헌정 중단 위기를 극복한 군사작전이었다.

◆ 박필규 위원
한미일보 편집위원
육군사관학교 40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