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필 법원행정처장이 19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 회의에 출석해 조희대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 과정과 관련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노경필 법원행정처장이 다시 대통령 권력의 경계선에 섰다. 지난달 대법관으로서 대통령 불소추특권의 범위를 제한적으로 해석한 데 이어, 이번에는 사법부 2인자로서 대통령의 대법관 임명권이 대법원장의 제청권까지 대신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18일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와 김성수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신임 대법관 후보자로 서면 제청하자 여권은 ‘대통령 패싱’이라며 반발했다. 사퇴와 탄핵 요구까지 나왔다.
그러나 하루 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한 노경필의 설명은 여권이 제시한 그림과 달랐다. 조희대가 이재명과의 면담을 요구했지만 기회를 얻지 못했고,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협의해 서면 제청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면담 요구했지만 기회 없었다”
노경필은 19일 법사위에서 조희대가 서면 제청 전 대통령 면담을 요구했느냐는 질문에 “요구했는데 안 됐다”고 답했다. 요청 시점에 대해서는 “그 전부터 말씀드렸다”고 했다.
서면 제청 방식도 대법원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는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서면 제청 방안이 나왔다며 “민정수석과 협의해서 서면 제청하는 방법을 합의했다”고 밝혔다.
통상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만나 후보자를 협의한 뒤 공식 제청서를 인사혁신처에 보내지만, 이번에는 두 사람이 만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마지막 수단으로 서면 제청을 선택했다는 설명이다.
노경필은 “두 분이 만나서 합의한 후 서면으로 보내는데, 두 분이 합의할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마지막 남은 방법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답변의 진위를 추궁받자 “거짓말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이는 법원 관계자의 익명 해명이 아니다. 청와대와의 인선 협상 과정을 파악하고 있는 법원행정처장이 국회에서 책임지고 한 공개 증언이다.
노경필의 답변대로라면 조희대가 청와대와 아무런 협의 없이 기습적으로 후보자를 통보했다는 ‘대통령 패싱’ 주장은 사실관계와 배치된다. 조희대가 면담을 피한 것이 아니라 청와대가 면담 기회를 마련하지 않았고, 서면 제출 방식도 민정수석실과 협의됐다는 설명이기 때문이다.
다만 서면 제출 방식에 동의한 것과 손봉기 제청에 동의한 것은 구분해야 한다. 양측은 제청 형식을 협의했지만 후보자를 놓고는 끝내 합의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청와대가 조희대의 면담 요청을 언제 받았는지, 왜 이재명과의 면담이 성사되지 않았는지, 민정수석실이 서면 제청에 어디까지 동의했는지 밝힐 차례다.
“대법원장은 제청권, 대통령은 임명권”
노경필은 대법관 인선을 둘러싼 권한 관계도 분명히 했다. 그는 대법원장이 자신의 판단에 따라 후보자를 제청할 수 있고, 대통령은 헌법이 부여한 임명권을 행사하면 된다는 취지로 답했다.
헌법 제104조 2항은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한다. 대법원장의 제청권, 국회의 동의권, 대통령의 임명권을 나눠 어느 한 기관도 대법관 인선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한 구조다.
그런데 대통령이 원하는 후보를 대법원장이 반드시 제청해야 한다면 제청권은 대통령 인사안을 전달하는 형식적 절차로 전락한다. 대통령이 후보 선정부터 다수당의 국회 동의와 최종 임명까지 사실상 지배하는 결과도 낳을 수 있다.
여권은 조희대가 대통령 임명권에 도전했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대통령의 임명권이 대법원장의 후보 선정과 제청권까지 포함하는지도 물어야 한다. 대법관까지 대통령이 직접 골라야 한다면 제왕적 대통령 권한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반론을 피하기 어렵다.
청와대가 원한 김민기는 누구인가
이번 충돌의 중심에는 노태악 전 대법관 후임 인선이 있다.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는 지난 1월 김민기·박순영·손봉기·윤성식 판사 등 4명을 후보자로 추천했다.
청와대는 김민기 서울고법 판사를 선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조희대는 약 7개월간 이어진 협상 끝에 김민기가 아닌 손봉기를 제청했다.
김민기는 우리법연구회 출신이다. 배우자는 이재명이 대통령 지명 몫으로 임명한 오영준 헌법재판관이다. 오영준 역시 우리법연구회에서 활동했다. 김민기가 대법관이 됐다면 이재명 정부가 임명한 헌법재판관의 배우자가 이재명 정부 첫 대법관으로 임명되는 구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재판소원제가 도입된 상황에서는 김민기가 관여한 대법원 판결을 남편 오영준이 재직하는 헌법재판소가 다시 심리하는 구조도 발생할 수 있다. 오 재판관이 개별 사건에서 회피하더라도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라는 두 최고 사법기관에 부부가 동시에 재직하는 데 따른 공정성 논란은 남는다.
조희대가 김민기의 우리법연구회 경력이나 배우자 관계 때문에 그를 제청하지 않았다고 확인된 것은 아니다. 다만 김민기의 이력과 청와대가 그를 요구한 과정, 재판소원제가 만든 이해충돌 우려는 이번 인선 대치의 성격을 짐작하게 한다.
7·9 판결 다음 날 노경필 발탁
노경필의 법사위 답변이 갖는 무게는 그의 최근 판결 이력과도 연결된다.
대법원 제3부는 지난 7월9일 윤석열 전 대통령 사건인 2026도6500 판결에서 헌법 제84조의 ‘소추’를 형사사건에 대해 공소를 제기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대통령 불소추특권은 법 앞의 평등원칙에 대한 예외이므로 적용 범위를 지나치게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도 제시했다.
이 판결에는 재판장 이흥구 대법관과 주심 이숙연 대법관, 노경필 대법관이 참여했다. 오석준 대법관은 회피했으며 공개된 판결에는 별개의견이나 반대의견이 표시되지 않았다.
판결의 직접적인 쟁점은 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 가능 범위였다. 취임 전에 기소된 대통령의 재판을 계속할 수 있다고 직접 판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법원이 소추를 공소제기로 정의하고 불소추특권의 확대해석을 경계하면서 이재명의 중단된 형사재판을 다시 판단할 새로운 법적 사정이 생겼다.
조희대는 판결 선고 다음 날인 7월10일 노경필을 신임 법원행정처장으로 발탁한다고 발표했다. 노경필은 7월14일 취임했다. 대통령 불소추특권의 범위를 정한 판결에 참여한 대법관이 닷새 뒤 사법부 2인자가 된 것이다.
한 달여 뒤 노경필은 국회에서 대통령의 대법관 임명권과 대법원장의 제청권을 구분했다. 조희대가 침묵하는 동안 노경필이 대통령 면담 요청과 청와대 협상 과정을 공개하고 여권의 ‘패싱’ 공세를 받아냈다.
대통령의 헌법상 권한은 존중돼야 한다. 그러나 불소추특권이 수사와 기존 재판까지 막고, 임명권이 대법원장의 후보 제청권까지 지배해야 한다면 대통령 권력의 끝이 어디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번 파동은 대면이냐 서면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의 임명권을 존중하라는 것인지, 대법관 후보까지 대통령이 직접 골라야 한다는 것인지가 핵심이다. 청와대와 대법원이 대통령 권력의 경계를 놓고 정면으로 충돌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