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신동춘 칼럼]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의 숨은 이야기
  • 신동춘 자유통일국민연합 대표
  • 등록 2025-12-16 12:53:40
기사수정

1950년 12월24일 흥남 철수의 마지막 배인 메레디스 빅토리호가 1만4000명의 피난민을 태우고 출항한 사건을 구성한 조형물.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전시돼 있다. Ⓒ한미일보

신동춘 자유통일국민연합 대표·행정학박사 2025년 12월11일 오전,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장군 동상 앞에서는 장진호 전투 75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혹한 속에서 자유를 지켜낸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작전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애국 시민과 원로, 군·외교·종교계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재춘 장진호 전투 기념사업회 상임대표는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공산화의 위기에서 살아남은 ‘승리한 전쟁’이었음을 분명히 했으며, 장경덕 공동대표는 자신의 가족사가 곧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의 역사였음을 증언하며, 한국군의 희생과 공헌이 잊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장진호 전투(Battle of Chosin Reservoir)는 1950년 11월27일부터 12월13일까지 한국전쟁 중 북부 장진호 지역에서 벌어진 미군과 유엔군(약 3만 명) 대 중공군 (약 12만 명)의 치열한 전투였다. 

 

영하 30도 이하 극한의 추위 속에서 미군은 압도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후퇴하며 생존한 ‘기적의 후퇴’로 불리며, ‘Chosin Few(장진호의 소수)’의 신화를 남겼다. 유엔군은 △전사·실종 약 4385명 △동상·부상자 7338명 등 약 1만2000명의 사상자를, 중공군은 약 5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미군이 이 전투를 초신 전투(Battle of Chosin Reservoir)라고 부른 것은 당시 사용한 지도가 일제시대 때 제작된 것으로, 장진(長津)을 일본식 발음인 ‘초신(Chosin)’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장진호는 일제시대에 수력발전을 위해 강을 막아 건설한 인공 호수로, 미군이 일본의 지도를 사용하며 작전을 하였기 때문에 초신 전투라고 한 것이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후,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을 압록강까지 몰아붙였다. 맥아더 사령관은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고 병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겠다”며 대대적인 북진을 감행했다.

 

그러나 유엔군은 중공군의 포위와 강력한 공격을 받으면서 철수를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미 제1해병사단은 하갈우리에서 고토리로 이동하여 안전한 철수를 위한 도로와 다리를 확보하는 것이 절실했다. 

 

유엔군은 중공군이 파괴한 교량을 보수하거나 우회도로를 구축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했는데, 포병 및 박격포 사격의 엄호 아래 이동하며 가능한 한 빠르게 다리를 확보했다.

 

고토리의 별 

 

장진호 전투 중 가장 감동적이고 유명한 에피소드 중 하나가 바로 고토리 비행장에 뜬 크리스마스 별 이야기이다. 미 해병 제1사단은 장진호에서 120km 남쪽 흥남 항구로 철수 중이었다. 

 

고토리는 장진호와 흥남을 잇는 유일한 도로의 중간 지점에 위치했지만 중공군이 고토리 주변 고지를 점령하고 있어, 부상자 4000여 명을 수송 중인 해병대는 이곳에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추위는 -35℃ 이하로 부상자들은 동상·출혈로 계속 사망하고 있었다. 

 

12월4일 밤, 고토리 상공에 갑자기 엄청나게 밝은 별 하나가 떠올랐다. 그 별은 움직이지 않고 정확히 고토리 비행장 위에 떠 있었다. 해병대원들은 곧 그 별이 미 공군 C-47 수송기가 떨어뜨린 대형 낙하산에 매달린 마그네슘 조명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조명탄은 고토리 전체를 대낮처럼 밝혔다. 미 공군은 그 밝은 빛 속에서 고토리 비행장(길이 800m 정도의 임시 활주로)에 수송기 8대를 연속 착륙시켰고, 12월4일 밤부터 5일 새벽까지 총 4689명의 부상자·동상 환자를 공수로 구출하였다. 해병대원들은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별을 하나 달아주셨다”고 전하고 있다.

 

‘후퇴’가 아니라 ‘뒤로 전진’

 

1950년 12월4일경, 흥남 부두로 철수하던 중 기자들이 “우리가 지금 퇴각하는 것이냐?”고 묻자, 미 1해병사단 올리버 스미스(Oliver P. Smith) 소장은 “Retreat, hell! We’re not retreating, we’re just advancing in another direction(퇴각이라니, 터무니없다! 우리는 퇴각하는 게 아니라, 단지 다른 방향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고 대답했다. 

 

미 해병대에는 역사적으로 ‘퇴각’이라는 기록이 거의 없다. 스미스 장군은 부하들이 ‘패배’라는 심리적 충격을 받지 않도록 언어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뒤로 전진’이라고 번역해 널리 알려졌다. ‘뒤로 전진’은 올리버 스미스 장군이 장진호에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10만여 명(해병·육군·한국군·민간인 포함)을 무사히 흥남으로 철수시키면서 남긴 실제 역사적 어록이며, 오늘날까지도 미 해병대의 전투 정신을 상징하는 말로 남아 있다.

 

금년 기념식 뒷풀이에서는 종군기자 등이 극한의 상황에서 찍은 전투와 철수 장면 및 생존자의 증언이 수록된 1시간50분짜리 영상을 시청, 인간 승리의 감동적인 순간을 생생하게 목격했다.(영어 비디오 원본을 민선홍 작가가 번역하고 조형곤 사무총장이 자막 처리 및 낭독) 

 

학도병 통역장교 이종연

 

이종연은 6·25 전쟁 당시 고려대 학생 신분의 미 해병대 통역장교로 장진호 전투에 직접 참전했다. 그는 추위로 발가락 동상이 걸려 절단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미군 트럭에 매달려 이동하며 중공군 매복을 뚫었다. 

 

그는 “눈 속에 친구들 시신을 묻고 총알 피하며 영어로 ‘Go! Go!’ 외쳤다”는 증언을 남겼다. 종전 후 미군 훈장을 받았으며, 미국에 건너가 살면서 2010년 자서전 ‘Old Chosin(올드 초신)’을 출간해 베스트셀러가 됐다.

 

크리스마스의 기적 

 

장진호에서 빠져나온 미 제10군단(해병 제1사단, 미 육군 제3·7사단 등)은 함경남도 흥남항으로 집결했다. 미군은 군부대 철수뿐 아니라 대규모 민간인 구출까지 감행했다. 군인·민간인 각각 약 10만 명을 미군 수송선·상륙함 193척으로 실어 날랐다.

 

가장 유명한 장면은 1950년 12월24일 마지막 배인 메레디스 빅토리호가 1만4000명의 피난민을 태우고 출항한 일이다. 설계 정원 12명(승무원 포함 60명)의 화물선이 1만4000명을 태워 ‘기적의 항해’로 불린다. 

 

출항 후 5명의 아기가 배 안에서 태어났는데 각각 김치 1·2·3·4·5로 이름을 지어주었다. 장진호 전투 기념사업회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장경덕 박사 역시 기적과 은총의 주인공이다. 


철수 작전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세브란스 의전 동기였던 현봉학 박사의 권유로 당시 함경남도에서 개업의를 하고 있던 부친이 모친과 함께 미군의 선의로 LSD에  승선했다. 


장박사는 이때 어머니 뱃속 5개월의 태아로 무사히 부산에 도착하여 출생했으며 현재 애국 의사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작전으로 구출된 민간인들은 대부분 함경도·평안도 출신으로, 공산 치하에 남을 경우 보복이 두려워 목숨을 걸고 따라왔다. 현재 기적의 배 메레디스호는 미국의 샌디에고 항에 보관되어 있다고 이곳을 방문한 고영주 자유민주당 대표가 전하고 있다. 

 

그는 최근 미국 방문 중 샌디에이고에서 미 해병 1사단을 직접 찾아간 경험을 소개하면서, 사단장까지 완전군장을 갖춘 채 “한국에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참전하겠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며, 한미동맹과 자유를 지키려는 의지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강조했다.

 

흥남 피난민 특히 공업 관련 인력은 대한민국의 초기 철강·화학·비료 등 산업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현재 약 100만 명의 흥남 피난민 후손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추위와 죽음의 계곡’이었던 장진호에서 시작된 철수는, 결국 흥남항에서 10만 명의 생명을 구한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완성되었다.

 

굳세어라 금순아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 홀로 왔다….”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는 가수 현인이 불러 많은 사랑을 받은 곡이다. 1953년 발표된 트로트 곡으로, 흥남 철수 작전 당시 가족·연인과 생이별한 실향민의 아픔을 담고 있다. 

 

결코 끝나지 않은 전쟁

 

미 해병대를 비롯해 육군·재향군인회·국방부가 6·25전쟁을 ‘The Unfinished War’ 또는 ‘The Forgotten War that Never Really Ended’라고 부르는 이유는 첫째, 현재에도 휴전 협정 체제가 계속되고 있으며, 둘째, 미군이 여전히 전투태세로 주둔하고 있기 때문이며, 셋째, 미군 내부에서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표현을 공식·비공식적으로 계속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1950년 11월7일 맥아더 장군은 트루먼 정부에 중공군을 조기에 괴멸시킬 수 있는 다섯 가지 방안을 제시했음을 상기시켰다. 

 

중공군의 주요 기지에 대한 타격, 해상·경제 봉쇄, 그리고 장제스 군의 본토 진입을 통해 한 달 내 전쟁을 종결할 수 있다는 전략이었는데, 당시 미국 정부 내 핵심 책임자였던 인물이 이를 반대했고, 그 결과 맥아더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성중경 목사는 전했다. 

 

기억과 추모의 행사 

 

미국 단체 ‘The Chosin Few’는 전투의 기억과 전우애를 보존하고 그 유산을 후대에 전파하기 위해 매년 대규모 재회(Reunion)와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Korean War Memorial)와 같은 주요 장소에서 희생된 전우들을 기리는 헌화식을 가지며, 국립 해병대 박물관에 ‘Chosin Few’ 전투 기념비를 헌정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1997년 4000여 명의 생존자들이 동상 후유증 보상을 받았다. 

 

우리나라의 민간단체인 장진호 전투 기념사업회는 2020년 12월11일(전투 종료일) 인천 자유공원에서 7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한 이래 해마다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생존 용사 인터뷰 수집, 역사 교육 자료 배포 등 매년 장진호 전투의 혹한 속 희생을 재조명하며, 청소년 대상 강연을 통해 전쟁의 교훈을 전파하고 있다. 

 

2020년 기념식 행사를 미국에 동시 송출했는데, 미 상·하원 의원들과 국무부·국방부·정보기관 관계자들까지 영상을 시청했다는 피드백을 받았다고 성상훈 기획위원장이 전했다.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의 역사적 의의

 

장진호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스탈린그라드 전투, 모스크바 전투와 함께 세계 3대 동계 전투로 알려져 있으며, 극한의 추위와 적의 공격을 동시에 견뎌낸 것으로 전투 역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번 기념식에서 이동복 전 의원은 “역사적으로 위대한 전투는 병력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정신과 의미로 기억된다”며 불과 300명으로 페르시아 대군과 싸운 스파르타군의 테르모필레 전투,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1차 전투를 예로 들었다. 이러한 전통이 현대에 되살아난 사례가 바로 장진호 전투라고 강조했다.

 

장진호 전투는 군사적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도 유엔군은 포위를 뚫고 조직적인 철수를 성공시킴으로 전쟁 초반 중공군의 ‘불패 신화’를 깨뜨렸다. 이에 미 해병대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또 ‘흥남 철수’는 6·25전쟁 중 최대 규모의 민간인 구출 작전이었다.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니라 대한민국 현대사의 출발점 중 하나로 한미동맹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미군이 자국 병력 철수도 급박한 상황에서 10만 명에 가까운 한국 민간인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구출한 것은 한미동맹의 도덕적 기반을 세운 결정적 사건이다.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는 미군의 한계와 강점을 동시에 드러내며, 이후 미국이 국방력 강화와 동맹 체제 확대를 추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는 ‘자유와 인간 존엄’을 지키기 위해 치러진 숭고한 희생의 상징으로 대한민국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자유통일국민연합 대표·행정학박사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0
좋아요
0
감동이에요
0
유니세프-기본배너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