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소송’ ‘1984’ ‘이방인’. [표지=열린책들, 문예출판사, 올리버]
사람은 생각을 말할 때 두 가지 방식을 쓴다. 하나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이야기다.
이 둘은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의견을 전달하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주장은 상대의 판단을 직접 겨냥한다. 이야기는 판단에 이르기 전의 감정과 상상을 먼저 건드린다.
주장과 서사의 차이
주장을 듣는 순간, 사람은 자동으로 방어 태세에 들어간다. 이 말이 나와 맞는지, 틀린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숨은 의도가 있는지 따진다. 말하자면 주장은 상대의 머리를 향해 직선으로 날아가는 화살이다. 맞으면 설득이지만, 빗나가면 즉시 반격이 돌아온다.
예를 들어 “현대 사회는 구조적으로 불공정하다”라는 문장을 보자. 이 문장은 즉시 반박의 대상이 된다. 언제부터, 어떤 기준으로, 어느 정도 불공정한지 묻게 된다. 통계와 비교, 반례가 등장한다. 주장은 이렇게 곧바로 싸움의 장으로 들어간다.
반면 이야기는 다르다. 같은 생각을 이런 식으로 풀 수 있다. 한 소설에서, 성실하게 일한 인물이 해고되고, 그 자리를 더 싸게 쓸 수 있는 다른 사람이 대신한다.
그는 불평하지 않는다. 규칙을 어겼다는 말도 없다. 다만 다시 구직 사이트를 켜고, 나이가 한 줄 더 늘어난 이력서를 수정한다. 작가는 불공정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는 불공정을 느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독자가 스스로 판단했다고 느낀다는 사실이다. 누가 설득하지 않았다.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방어도 작동하지 않는다.
주장은 항상 책임을 요구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그래서 주장은 말하는 사람에게 부담이다. 반면 이야기는 책임을 분산시킨다. 작가는 “이런 일이 있었다”고만 말하고,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 독자는 판단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판단이라고 느낀다.
이 때문에 논쟁적인 생각일수록 이야기의 옷을 입는다. 직접 말하면 공격받을 생각이, 이야기 속에서는 공감으로 바뀐다. 정치적 생각, 도덕적 판단, 사회 비판이 문학이라는 형식을 선호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주장은 직선이다. 서사는 곡선이다. 직선은 빠르지만, 곡선은 깊다. 독자는 곡선을 따라가며 자신도 모르게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 끝에 도달했을 때, 이미 마음은 움직여 있다.
그래서 서사는 안전하다. 말하는 쪽은 “나는 주장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고, 듣는 쪽은 “나는 그냥 이야기를 읽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생각은 이미 자리를 잡는다. 이 점에서 서사는 주장의 대안이 아니라, 주장을 우회하는 방식이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효과
문학에서 가장 강력한 표현은 종종 말해지지 않은 곳에 있다. 작가는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지점에서 말을 멈춘다. 그 멈춤이 독자를 생각하게 만든다.
작가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독자는 그 침묵을 해석한다.
사람은 설명을 들을 때보다, 설명이 끊긴 지점에서 더 많이 사고한다. 누군가 결론을 내려주면 우리는 그 결론을 검토한다. 그러나 결론이 없으면 우리는 스스로 결론을 만든다. 이때 만들어진 결론은 ‘설득된 생각’이 아니라 ‘내가 도달한 생각’이 된다.
예컨대 어떤 소설에서 억울한 누명을 쓴 인물이 법정에서 마지막 발언 기회를 얻는다. 독자는 당연히 항변을 기대한다. 그러나 그는 침묵한다. 작가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독자는 그 침묵을 해석한다. 체념일 수도 있고, 무력감일 수도 있으며,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체험일 수도 있다.
어느 해석이든 독자가 직접 만든 것이다. 그래서 더 깊이 남는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전쟁을 다룬 소설에서 작가는 전투 장면을 길게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전투가 끝난 뒤, 한 병사가 집에 돌아와도 잠을 자지 못하고 신발을 벗지 못한 채 앉아 있는 장면만 보여준다. 총성과 피, 비명은 없다. 그러나 독자는 전쟁의 파괴력을 충분히 느낀다.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달된 것이다.
이 방식은 이념과 결합할 때 특히 강력해진다. 이념은 설명될수록 경계받는다. 그러나 말하지 않으면 풍경이 된다.
예컨대 어떤 소설에서 공권력이 항상 늦게 도착하거나, 등장할 때마다 상황을 악화시키는 역할만 맡는다면 어떨까. 작가는 국가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는 국가를 신뢰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효과다. 작가는 말을 줄이고, 독자는 생각을 늘린다. 그리고 그 생각은 비판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것을 ‘주장’이라고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념이 의견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
이념은 본래 의견이다. 찬반이 갈릴 수 있고, 논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학 속에 들어간 이념은 더 이상 의견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설명이 아니라 체험의 형태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 사회는 약자를 소외시킨다”고 말하면 반박이 가능하다. 그러나 한 소설에서, 노력해도 늘 같은 자리에 머무는 인물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그 좌절이 일상의 일부처럼 묘사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독자는 그 구조를 ‘주장’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런 세상’으로 받아들인다.
의견은 선택의 대상이다. 그러나 경험은 부정하기 어렵다. “나는 저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 고통은 잘못 느낀 것이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학은 바로 이 지점을 공략한다.
이야기 속 이념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설득하지 않는다. 인물의 삶을 둘러싼 공기처럼 스며 있다. 독자는 그것을 사상으로 인식하기 전에 현실로 받아들인다. 이 순간 이념은 감정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감정은 논쟁이 어렵다. 슬픔을 반박할 수 없고, 분노를 논파할 수 없다. 그래서 문학 속 이념은 비판의 칼날을 피해 간다. 더구나 이 패턴이 여러 작품에서 반복되면, 독자는 그것을 하나의 세계로 받아들인다. 어느 순간 그것은 의견이 아니라 “원래 그런 것”이 된다.
이렇게 형성된 인식은 교과서보다 오래 남는다. 설명보다 깊이 스며들고, 논문보다 넓게 퍼진다. 그래서 문학은 종종 정치보다 더 강력하다. 법을 바꾸지 않아도, 사람의 판단 기준을 바꾸기 때문이다.
소설은 어떻게 주장을 숨기고 판단을 이동시키는가: 문학작품 사례로 본 ‘이야기의 안전지대’
1. 상황만 던지는 방식: ‘소송’ 프란츠 카프카
‘소송’을 쓴 프란츠 카프카는 사상가나 정치 이론가가 아니다. 그는 법률을 공부했고, 보험회사에서 일했던 사무직 노동자였다. 다시 말해 그는 제도를 외부에서 비판한 사람이 아니라, 제도 안에서 일상을 보낸 사람이었다. 이 점은 ‘소송’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 소설에는 독자가 기대하는 기본적인 설명이 철저히 제거되어 있다. 소설은 요제프 K가 어느 날 아침 이유도 모른 채 체포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체포는 폭력적이지 않다.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무기를 들이대지도 않는다. 오히려 정중하다. 그러나 정중함 속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이유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곧 죄목이 나오겠지. 재판이 진행되면 설명이 있을 거야.
그러나 카프카는 끝까지 설명하지 않는다. 재판은 이어지지만, 법정은 이상한 공간에 있고, 절차는 불명확하며, 담당자는 계속 바뀐다. 법은 존재하는 듯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요제프 K는 질문을 던지지만, 질문은 공중에서 사라진다.
이 과정에서 카프카는 단 한 번도 판단을 내려주지 않는다.
“이 제도는 부당하다” “국가는 폭력적이다” “법은 인간을 억압한다” 이런 문장은 소설 어디에도 없다.
그 대신 카프카는 상황만을 끈질기게 반복한다. 설명되지 않는 체포, 끝나지 않는 재판, 책임지지 않는 권위. 독자는 이 상황을 따라가며 점점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답답함, 억울함, 불안이 쌓인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독자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판단이 완성된다. “이건 잘못됐다.”
이 문장은 독자가 만든 문장이다. 작가는 쓰지 않았다. 그래서 이 판단은 강력하다. 반박할 대상이 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프란츠 카프카가 “이 재판은 부당하다”라고 명시했다면, 독자는 그 문장을 논리적으로 검토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장을 제거하고 상황만 남겼다. 이때 소설은 완벽한 이야기의 안전지대가 된다. 작가는 끝까지 물러서 있고, 판단은 독자의 내부에서 완성된다.
2. 말하지 않음으로 독자를 내부자로 만드는 방식: ‘이방인’ 알베르 카뮈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철학자이기도 했지만, 이 소설에서는 철학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부조리, 도덕, 사회의 위선 같은 개념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상한 한 인간을 무표정하게 보여줄 뿐이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는다. 그는 태양이 눈부셔서 방아쇠를 당겼다고 말한다. 자신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해명하지 않는다. 후회도, 변명도 없다. 독자는 처음에 당황한다. 이 인물은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중요한 점은, 카뮈가 이 인물을 해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뫼르소는 기존 도덕에 저항한다” “그는 사회의 위선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이런 설명은 없다.
재판 장면에서 결정적인 장면이 나온다. 살인의 구체적 정황보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크게 문제 된다. 법정은 그의 범죄보다 그의 태도를 심판한다. 이때 독자는 불편해진다. “이 재판은 이상하다” “뭔가 엇나갔다”.
그러나 이 판단을 누가 말했는가. 작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뮈는 판단을 독자에게 떠넘긴다. 독자는 더 이상 소설을 읽는 외부인이 아니다. 그는 재판을 바라보는 도덕적 판사의 자리에 앉아 있다.
이 순간 독자는 이야기의 내부자가 된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독자를 끌어들인 것이다. 이것이 말하지 않음의 효과다. 판단은 강요되지 않았기 때문에, 독자는 그것을 자신의 판단으로 받아들인다.
3. 이념을 의견이 아니라 ‘세계’로 만드는 방식: ‘1984’ 조지 오웰
조지 오웰의 ‘1984’는 흔히 정치소설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 소설의 핵심은 정치 비판이 아니라 세계 구성 방식에 있다. 오웰은 “전체주의는 나쁘다”라고 선언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독자를 그 안에 집어넣는다.
뉴스피크, 사상경찰, 텔레스크린, 이 모든 것은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환경이다. 주인공 윈스턴은 이 세계에 의문을 품지만, 그 의문조차 언어적으로 제한된다. 독자는 처음에는 이렇게 읽는다. “만약 이런 사회라면?” 그러나 읽을수록 질문은 바뀐다. “이건 사회가 아니라 감옥이다” “숨이 막힌다”.
이 판단은 정치적 의견이 아니다. 체험의 결과다. 독자는 전체주의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채택한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싫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반박이 어렵다.
누군가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 세계가 숨 막히게 느껴진 건 네 착각이다.” 이념이 의견이 아니라 감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순간 ‘1984’는 주장하지 않는다. 체험 장치로 작동한다.
4. 피해를 반복해 세계관을 만드는 방식: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흔히 사회 고발 소설로 불린다. 그러나 이 소설은 고발하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피해의 장면을 반복 배치한다.
해고, 철거, 질병, 죽음. 이 사건들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작가는 개발 정책을 설명하지 않고, 경제 구조를 분석하지 않는다. 그저 한 가족의 삶이 차례로 무너지는 장면을 보여준다.
처음 독자는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반복이 쌓일수록 감정은 바뀐다. “왜 항상 이 사람들만 이런 일을 겪는가? 이 질문이 떠오르는 순간, 독자는 이미 구조를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 구조는 설명된 적이 없다. 그래서 이것은 의견이 아니라 세계관이 된다.
독자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는 자본주의 비판에 동의한다.” 대신 이렇게 느낀다. “이건 너무 잔인하다.” 이 감정은 반박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소설은 오래 살아남는다.
왜 이것이 ‘안전지대’인가?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아무도 최종 문장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가는 폭력적이다. 사회는 불공정하다. 제도는 인간을 파괴한다. 이 문장들은 소설에 쓰여 있지 않다. 독자의 머릿속에서 완성된다. 작가는 그 자리를 비워둔다. 이 비워둔 공간이 바로 이야기의 안전지대다.
작가는 “나는 묘사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고, 독자는 “나는 느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판단은 이미 형성됐다. 문학이 위험해지는 순간은 거짓을 말할 때가 아니다. 판단이 만들어지는 경로를 보이지 않게 할 때다.
여기까지 오면 독자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려는가?” 대신 이렇게 느낀다. “이미 그렇게 느껴버렸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이승만학당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