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松山칼럼ㅣ종북 좌파 80년사] ㉗1985~1987 반미 집회와 폭력 미화
  • 松山 작가
  • 등록 2026-07-06 19:07:34
기사수정

1985년 5월 서울 을지로 미문화원을 점거 중인 학생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1985년은 대한민국 학생운동의 성격이 눈에 띄게 달라진 해였다. 1980년 광주 이후 대학가는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을 중심으로 움직였지만, 1985년부터는 일부 운동권이 반독재를 넘어 반미를 독립된 정치 의제로 내세우기 시작하였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운동과 미국의 대한정책을 비판하는 운동이 하나의 흐름으로 결합하기 시작한 것이다.

 

1. 1985년, 반미는 어떻게 학생운동의 핵심 의제가 되었는가

 

이 변화는 정부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교육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85년 전국 대학에서는 교내 집회·시위 및 각종 소요가 모두 3877건 발생하였다. 학생 시위 참가 연인원도 약 46만9000명으로 집계되었다. 

 

서울대·고려대·연세대·서강대·성균관대·이화여대뿐 아니라 부산대·경북대·전남대·충남대 등 전국 대학이 시위의 무대가 되었다. 대학가는 더 이상 개별 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 정치 공간으로 변하고 있었다.

 

학생운동 조직도 빠르게 재편되었다. 기존 총학생회 중심의 활동에서 벗어나 학습조직과 지역 연합체가 등장했고, 노동현장과 농촌 봉사활동을 연결하는 조직도 확대되었다. 

 

이 무렵 등장한 대표적 조직이 삼민투(三民鬪, 삼민투쟁위원회)였다. 삼민투는 ‘민족통일·민중해방·민주쟁취’를 내세우며 기존 학생운동보다 급진적인 노선을 제시하였다. 정부는 이를 이적 성향 조직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하였다.

 

사상적 흐름도 분화되기 시작했다. 훗날 민족해방(NL) 계열로 발전하는 학생들은 한국 사회의 문제를 분단 체제와 미국의 영향력에서 찾았다. 

 

반면 민중민주(PD) 계열은 자본주의 구조와 계급 문제를 중심으로 사회를 해석하였다. 두 노선은 이론적으로 차이가 있었지만 반정부 집회에서는 함께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1990년대 학생운동의 대부분은 이 두 흐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1985년 학생운동을 전국적 정치 이슈로 만든 결정적 사건은 미국문화원 점거 사건이었다. 미국 외교관들의 회고와 미국 외교문서에 따르면 1985년 5월25일, 학생 73명이 서울 중구 정동 미국문화원(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USIS) 도서관에 진입하여 농성을 시작하였다. 국내 자료 가운데는 점거 준비와 농성을 포함해 5월23일부터 26일까지의 사건으로 정리하는 경우도 있다.

 

학생들은 미국 정부가 1980년 광주 당시 전두환 정부를 사실상 묵인했다고 주장하며 당시 주한 미국대사 Richard L. Walker의 공식 사과와 미국의 대한정책 전환을 요구하였다. 농성 현장 협상은 미국대사관 정무담당관 Thomas P. Dunlop이 맡았다. 그는 훗날 미국 외교구술사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는 조기 진압을 원했지만 미국은 무력 진압보다 협상을 선택했다고 회고하였다. 학생들은 사흘 동안 농성을 계속한 뒤 평화적으로 퇴거하였으며, 이후 참가자들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 사건은 국내외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조선일보·동아일보·경향신문은 연일 학생들의 요구와 정부 대응을 상세히 보도했고, 미국의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 등 해외 언론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를 주요 국제 뉴스로 다루었다. 미국 국무부 역시 서울 공관의 안전 문제를 검토하며 상황을 본국에 보고하였다. 반미운동이 국내 학생운동을 넘어 국제 외교 문제로까지 확대된 것은 이 사건이 처음이었다.

 

학생운동 내부에서도 미국문화원 점거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이전까지 미국은 민주화 과정에서 비판의 대상 가운데 하나였지만, 이후 일부 운동권에서는 미국을 한국 사회 모순의 핵심 원인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광주 문제, 한미동맹, 주한미군, 통일 문제를 하나의 틀에서 설명하는 담론도 이 무렵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모든 학생운동 세력이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미국문화원 점거와 같은 직접 행동을 정당한 정치적 저항으로 평가했지만, 다른 일부는 외교시설 점거가 국제법적 논란을 낳고 민주화운동 전체의 지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이 논쟁은 단순한 전술 차이가 아니라 학생운동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둘러싼 노선 논쟁의 출발점이었다.

 

1985년은 단순히 시위가 많았던 해가 아니었다. 학생운동의 조직 구조가 바뀌었고, 이념이 분화되었으며, 반미가 독립된 정치 의제로 자리 잡기 시작한 해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이듬해 5·3인천사태, 건국대학교 사건,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며 훨씬 큰 규모의 정치적 격변을 만들어 가게 된다.

 

2. 1986~1987년, 거리의 투쟁과 민주화의 분기점

 

1986년 학생운동은 1985년에 형성된 조직과 노선을 바탕으로 더욱 큰 규모의 연대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시위는 인천·부산·광주·대구·대전 등 전국 주요 도시로 확산되었고, 대학별 총학생회와 지역 학생회 연합체는 공동 집회와 공동 성명을 통해 전국적 행동을 조직하였다. 정부는 전투경찰 증원과 최루탄 사용 확대 등 강경 대응으로 맞섰고, 학생운동은 이에 맞서 대중 동원 능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 사건이 1986년 5월3일 인천사태였다. 인천 시민회관과 주안역, 동인천역 일대에서는 학생과 재야단체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고, 시위는 경찰과의 대규모 충돌로 이어졌다. 정부는 이를 불법 폭력 시위로 규정했고, 참가자 상당수가 연행되거나 구속되었다. 

 

반면 학생운동 진영은 과잉 진압과 최루탄 사용을 비판하였다. 인천사태는 이후 전국 대학가에서 연대 시위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학생운동이 지역별 시위를 넘어 전국 단위 행동으로 발전하는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같은 해 10월28일부터 31일까지는 서울 건국대학교에서 전국 규모의 학생 집회가 열렸다. 전국 여러 대학 학생들이 교내에서 농성을 벌이며 민주화와 사회 개혁을 주장하자 경찰은 학교를 포위하고 진압 작전을 실시하였다. 

 

헬기를 동원해 대량의 최루탄이 투입되었고, 자료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1200명에서 1500명 안팎의 학생이 연행되거나 검거되었다. 건국대학교 사건은 1980년대 학생운동 관련 사건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검거 사례로 기록되며, 정부의 강경 진압과 학생운동의 조직력이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으로 남았다.

 

1987년은 학생운동뿐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 전체의 향방을 바꾼 해였다. 1월14일, 박종철이 경찰 조사 과정에서 고문을 받아 사망하였다.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설명했지만, 부검 결과와 후속 보도를 통해 고문 사실이 드러났다. 이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추가 사실을 공개하면서 사건은 학생운동을 넘어 전국적인 민주화 요구로 확산되었다.

 

또 다른 전환점은 1987년 6월9일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진 사건이었다. 이한열은 7월5일 사망했고, 장례식에는 수많은 시민이 참여하였다. 그의 죽음은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으며 시민 참여를 더욱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6월10일부터 29일까지 이어진 6월 민주항쟁은 학생운동만의 시위가 아니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중심으로 종교계·교수·변호사·회사원·노동자와 일반 시민이 대거 참여하였다.

 

서울 시청 앞과 명동성당, 종로, 신촌뿐 아니라 부산, 광주, 대전, 대구, 전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집회가 열렸고, 정부는 결국 6월 29일 여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의 특별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수용하였다.

 

민주화가 진전되는 과정에서도 학생운동 내부에서는 시위 방식과 노선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었다. 일부는 화염병과 점거 농성을 국가권력에 맞선 저항으로 정당화했고, 다른 일부는 이러한 방식이 시민의 지지를 약화시키고 민주화운동의 정당성에도 부담을 줄 수 있다고 보았다. 학생운동은 하나의 조직이 아니라 다양한 노선과 전략이 공존하는 집합체였으며, 모든 참가자가 동일한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민주화 직후에는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노동자 대투쟁이 이어졌다. 전국에서 3000건이 넘는 노동쟁의가 발생했고, 노동조합 결성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이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기아산업 등 주요 사업장으로 확산되었다.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의 현장 진출도 활발해지면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연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1985년부터 1987년까지의 학생운동은 민주화를 향한 거대한 사회운동인 동시에, 운동의 이념과 수단을 둘러싼 논쟁의 시기이기도 했다. 반미 담론의 확대, 전국 조직의 성장, 대규모 거리 시위, 그리고 민주화 이후 노동 현장으로의 확장은 이후 1990년대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 松山 정광제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펴냈다. 松山(송산)은 필명이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0
좋아요
0
감동이에요
0
정기구독배너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