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엔권 엔화 [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국이 엔화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이례적으로 일본과 함께 외환시장에 공동 개입한 것을 두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국채 금리 등을 고려해 이번 조치에 나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3일(현지시간) "일본 통화의 약세는 도쿄뿐 아니라 워싱턴에도 문제였다"며 미국의 셈법을 이같이 짚었다.
4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낮아진 엔화 가치가 미 국채 금리를 끌어올릴 수 있는 위협이 되는 데다 일본이 무역협상을 통해 약속한 수백조 원대 규모의 대미 투자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면서 미국이 엔화 부양에 나섰다는 진단이다.
시장에서는 미일 당국이 지난달 30일 밤부터 이달 1일 새벽에 걸쳐 간헐적으로 엔화 매수·달러 매도 개입을 한 데 이어 3일에도 사흘째 개입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앞서 사쓰키 일본 재무상은 담화를 통해 지난달 31일 미국과 일본 정부가 공동으로 엔화 매수 개입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부 장관도 엑스(X·옛 트위터)에 발표한 성명을 통해 이 같은 내용을 공식 확인했다.
미국과 일본이 이번처럼 엔화 약세를 막기 위해 엔화를 공동 매수한 것은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인 1998년 이후 28년 만이다.
베선트 미 재무장관(왼쪽)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총리(2026년 5월 12일) [AP=연합뉴스]
WSJ은 "다른 나라를 대신해 미국이 외환시장에 개입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며 미국이 이처럼 이례적인 개입에 나선 것은 미 정부가 엔화 강세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미국이 엔화 강세를 원하는 이유는 다양하다"면서 "엔화는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과의 금리 격차 때문에 자금조달 통화로 인기가 높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과거 위기들은 (엔) 캐리 트레이드에서 자금이 무질서하게 빠져나가는 데 따르는 위험을 보여준 바 있다"있다고 이 신문은 소개했다.
컨설팅업체 이스트아시아이콘의 폴 케이비 대표는 WSJ에 "미국은 엔화의 급격한 매도가 세계 금융 안정성을 훼손할까 우려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캐리 트레이드란 금리가 낮은 국가에서 돈을 빌려 고수익 자산에 투자하는 기법을 말한다.
세계 각국의 투자자들은 일본의 초저금리 정책이 지속되는 지난 수십 년간 저리의 엔화로 돈을 빌려 달러화 등 다른 나라 통화로 환전(엔화 매도)한 후 수익률이 높은 자산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 전략을 펼쳐왔다.
미래 엔화 가치가 약세를 띨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이 같은 엔 캐리 트레이드의 매력도는 더욱 높아지게 된다.
문제는 일본이 금리를 인상할 경우 그간 초저금리에 엔화를 빌려 미국 국채와 주식 등에 투자하던 투자자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자금을 회수해 갈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이 일어나면 미국 국채 가격이 하락(국채 금리 상승)하고, 글로벌 증시의 변동성을 키우며 주가에 하락 압력을 가할 수 있다.
미국 국채 금리가 오르면 이와 연동된 미국 내 주택담보대출 금리도 상승하게 되는데,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으로선 정치적 부담 요인을 최소화고자 금리 상승 유발 요인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을 유인이 크다.
미국 주택담보대출의 준거가 되는 30년 만기 미국채 금리는 지난달 31일 5.28%로까지 오르며 2007년 7월 이후 19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보인 바 있다.
뉴욕 증권거래소의 트레이더 [AFP=연합뉴스 자료사진]
2년 전엔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조짐만으로 국제 금융시장이 크게 출렁이는 일이 실제로 발생하기도 했다.
일본은행이 2024년 7월 기준금리를 0∼0.1%에서 0.25%로 올리고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추가 인상을 시사하자 엔 캐리 자금이 일본으로 복귀하는 흐름이 나타나며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 단기 충격이 발생했던 것이다.
2024년 8월 5일 당시 일본 닛케이225 평균주가(닛케이지수)가 12% 급락해 1987년 '블랙먼데이' 이후 최악의 하루를 기록했고, 뉴욕증시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지수도 3% 급락해 2년 만에 최대 낙폭을 기록한 바 있다.
고용 악화 우려로 당시 하락 흐름을 보여왔던 미국채 10년물 수익률은 사흘 간 20bp(1bp=0.01%포인트) 급반등, 시장의 공포감을 더욱 키웠다.
이번 미일 당국의 이번 공동개입은 엔 캐리 트레이드의 매력을 약화시켜 2년 전과 같은 갑작스러운 청산 충격과 그에 따른 미국채 금리 급등을 예방하려는 게 주요 목적 중 하나였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지점이다.
로스앤젤레스항의 콘테이너선과 성조기 [AFP=연합뉴스 자료사진]
일본이 환율 방어를 위한 '달러화 실탄'을 확보하기 위해 보유 중인 미국채를 대량으로 매각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이번 공동 개입의 주된 배경으로 꼽힌다.
WSJ은 "미국 입장에선 일본이 방대한 미국채 보유분 일부를 매각해 자국 통화를 지지하는 방식을 택할 경우 이미 상승세인 미 국채 수익률에 추가 상승 압력을 가할 수 있다"라고 분석했다.
가타야마 사쓰키 일본 재무상도 3일 담화에서 미일 외환시장 공동개입 사실을 밝히면서 향후 개입용 달러화 자금 조달을 위해 미국채 보유분을 팔기보다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차입 창구를 활용할 계획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결국, 일본 정부로선 엔화 약세에 대응하기 위해, 트럼프 행정부로선 미국채 금리 상승을 막기 위해 미일 양국이 공동 대응에 나설 유인이 컸던 것이다.
엔화 약세가 지난해 미일 무역협정에 따른 일본 기업들의 대미 투자를 어렵게 한다는 점도 이번 공동 개입의 배경으로 꼽힌다고 WSJ은 설명했다.
앞서 일본 정부는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와 무역 협상을 타결하면서 5천500억 달러(약 790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무역적자를 줄이고 미국으로의 '제조업 리턴'을 위해 달러 약세를 선호한다는 입장을 오랫동안 밝혀왔다.
도쿄 시내의 엔화 환율 전광판 [EPA=연합뉴스]
달러에 견준 엔화 환율은 지난달 말 164엔에 육박해 엔화 가치가 약 40년 만의 최저로 떨어진 바 있다.
일본은 지난 4∼5월에도 엔화 가치를 떠받치기 위해 외환보유고 약 700억 달러(약 100조원)를 소진하며 외환시장 개입에 나섰지만, 엔화 약세 흐름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WSJ은 일본 당국이 최근 시장 개입에서 약 500억 달러(약 71조원)를 지출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미일 양국의 공동 환시 개입 여파로 달러화에 견준 엔화 환율은 이날 달러당 156엔대 후반으로 급락(엔화 가치 상승)해 거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