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막부는 니혼바시(日本橋)를 기점으로 도카이도, 나카센도, 닛코가도, 오슈가도, 고슈가도라는 오가도(五街道)를 정비했다. [사진=도쿄관광재단]
조선과 에도 일본의 차이를 반드시 성리학과 난학, 양반과 사무라이 같은 거창한 이야기에서 찾을 필요는 없다. 강을 만나면 어떻게 했는지를 보면 된다.
조선은 한양 한복판의 청계천에는 광통교와 수표교 같은 훌륭한 다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나라의 수도 바로 앞을 흐르는 한강에는 왕조가 끝날 때까지 상설교 하나를 놓지 못했다. 사람과 말과 물자는 나루에서 배를 기다려야 했다.
반면 일본은 에도를 건설하면서 강과 운하에 다리를 놓고 그것을 도로와 연결했다. 대표적인 것이 니혼바시(日本橋)다. 도쿠가와 막부는 니혼바시를 기점으로 도카이도, 나카센도, 닛코가도, 오슈가도, 고슈가도라는 오가도(五街道)를 정비했다.
길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슈쿠바(宿場)를 두고 사람과 말을 상비시켰다. 일본 국토교통성 자료를 보면 1601년 도카이도에 역참과 전마제도가 정비되기 시작했고, 1649년에는 도로 업무를 담당하는 도추부교(道中奉行)까지 설치되었다. 길과 다리와 역참을 국가 운영의 한 체계로 묶어버린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규모와 관리 방식이다. 에도시대 도카이도는 에도 니혼바시에서 교토까지 약 495.5㎞였고 53개의 슈쿠가 있었다. 나카센도 역시 교토까지 약 526㎞에 달했다.
1605년 막부가 정비한 주요 가도의 표준 폭은 약 9m였고 산간지역도 대체로 4~7m였다. 1리마다 이치리즈카(一里塚)를 세우고 가로수를 심었으며, 17세기에는 모래와 자갈을 이용한 노면 정비도 이루어졌다.
도로가 망가지면 다이묘와 다이칸이 보수했고 일상적인 유지에는 주변 마을까지 동원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야 불편한 흙길이지만 중요한 것은 당시 일본이 이미 길은 만들어놓고 끝나는 시설이 아니라 계속 관리해야 하는 사회 기반시설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1775년 일본을 여행한 스웨덴의 박물학자 툰베리는 일본 도로가 넓고 배수로를 갖추고 있으며 관리 상태가 좋다는 취지의 기록까지 남겼다.
조선과 비교하면 차이가 뼈아프다. 조선도 다리를 만들 줄 알았다. 수표교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렇다. 더구나 정조는 1795년 화성 행차를 위해 노량에 대규모 주교(舟橋), 즉 배다리를 만들었다.
정약용 등이 참여했고 조세 운반선과 훈련도감 소속 선박, 경강선을 동원하여 왕의 대규모 행렬이 한강을 건널 수 있게 했다. 이것은 조선에 토목기술도 조직력도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증거다.
바로 그래서 더 아프다. 왕이 지나갈 때는 한강에 거대한 다리를 만들 수 있었지만 백성이 매일 건너는 다리로 남기지는 못했다. 왕의 행차가 끝나면 배다리도 해체되었다. 국가의 역량이 왕실 행사에는 집중되었지만 그것을 상시적인 교통시설로 축적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일본의 니혼바시는 성격이 달랐다. 쇼군이 특별한 날 한번 건너기 위한 시설이 아니었다. 상인이 건너고 장인이 건너고 여행객이 건넜으며 물건이 오갔다. 그 다리를 기준으로 전국의 길이 뻗어나갔다.
도카이도에는 100명의 인부와 100필의 말을 상비하도록 하는 체계까지 갖추었다. 다리 하나를 놓는 데서 끝나지 않고 다리-도로-역참-운송을 연결했다. 에도의 도로 주변에는 상점이 늘어서고 도로는 생활과 경제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일본 국토교통성이 에도시대의 인프라를 설명하면서 도로망이 물자 이동뿐 아니라 각 지역의 문화와 음식이 교류되는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일본도 모든 강에 다리를 놓았던 것은 아니다. 큰 강이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서는 나룻배나 도보 도강을 이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일본에는 다리가 넘쳐났고 조선에는 다리가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면 틀린다.
비교해야 할 것은 다리의 숫자가 아니라 교통을 바라보는 국가의 태도다. 일본에서는 도로를 정비하고 역참을 설치하고 사람과 말을 상비시키며 이를 관리하는 관료조직까지 만들었다.
도쿠가와 막부가 이런 체계를 만든 첫째 목적에는 전국 지배와 다이묘 통제가 있었지만, 그 시설을 상인과 여행객도 이용하면서 시장과 도시가 함께 성장했다. 정치적 필요로 만든 길이 경제의 길이 된 것이다.
조선은 이 점에서 뒤처졌다. 성리학을 몰라서가 아니고 목공기술이 형편없어서만도 아니다. 국가가 교통과 유통의 편의를 얼마나 중요한 과제로 보았느냐의 차이가 컸다.
조선의 도로와 나루 역시 국가 행정과 역참 체계의 일부였지만, 한양과 지방을 빠르고 안정적으로 연결하여 상품과 사람이 움직이게 하는 교통망의 발전은 일본보다 더뎠다. 특히 수도를 끼고 흐르는 한강을 왕조 말기까지 상설교로 연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서울 최초의 한강 상설 교량은 조선왕조가 아니라 1900년 개통한 한강철교였다. 조선이 수백 년 동안 배로 건너던 강에 근대 교량이 등장한 것은 철도 건설과 함께였다.
이 차이는 훗날 더욱 크게 벌어진다. 에도시대에 이미 수백㎞의 가도와 역참, 교량, 운송체계를 운영해 본 일본은 메이지 시대가 되자 그 위에 철도와 근대 도로를 얹었다.
반면 조선은 개항기에 들어와서야 근대적 교통망 건설이라는 과제를 본격적으로 마주했다. 일본이 처음부터 근대국가였던 것은 아니다. 일본 역시 신분제 사회였고 봉건적 제약이 많았다. 그러나 에도시대부터 사람과 물자가 움직이는 길을 만들고 유지하고 관리하는 경험을 축적했다. 그 경험의 차이는 작지 않았다.
다리는 나무와 돌의 문제가 아니다. 다리는 국가가 이동을 어떻게 생각했느냐를 보여준다. 강 건너에 시장이 있어도, 사람이 있어도, 물건이 있어도 배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사회와 강 위에 다리를 놓고 그 다리를 수백㎞의 도로와 연결하는 사회는 시간이 갈수록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람의 이동속도가 달라지고 상품의 이동량이 달라지며 정보가 퍼지는 속도도 달라진다. 일본은 에도시대에 이미 그것을 국가 운영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조선은 강을 바라보았고, 일본은 강 위에 길을 만들었다. 문명을 비교하고 싶다면 궁궐의 크기만 보지 말아야 한다. 백성이 매일 밟고 다니던 길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강을 만났을 때 그 나라가 무엇을 했는지를 보아야 한다.

◆ 松山(송산) 정광제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