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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 한미칼럼] 진실을 법으로 정하는 나라, 그래도 좋다는 사람들
  • 김영 기자
  • 등록 2026-04-04 19: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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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의 성역화와 부정선거 금기, 질문을 막는 나라의 위험
  • 표현의 자유를 법으로 막는 순간, 자유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아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철조망·감시탑·세 마리 개의 실루엣을 결합한 상징 이미지. 레이건이 냉전 시절 즐겨 인용한 ‘세 마리 개’ 풍자는 먹을 것의 부족보다 더 근본적인 비극이 표현의 자유의 상실에 있음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한미일보 합성]

5·18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다. 이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인 10·26과 12·12 사태를 거쳐 1980년 봄으로 이어진 시기는 국가 권력도, 사회 질서도, 거리의 민심도 모두 흔들리던 격랑의 시간이었다. 

 

학생운동은 거셌고, 시민의 참여는 넓어졌고, 계엄의 그림자는 짙어졌다. 70년대 산업화의 속도는 빨랐지만, 정치의 균열은 더 빨랐다. 광주에서 벌어진 일은 바로 그 혼돈의 시대가 낳은 가장 비극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였다.

 

문제는 비극 그 자체보다, 그 비극을 국가가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비극을 기억하는 것과 비극의 해석을 독점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대표적 사례는 북한군 개입설이다. 여기서 국가가 할 일은 '논쟁의 관리'이지 법으로 논쟁을 막는 것이 아니다. 

 

5·18을 특별법으로 규정하고, 국가가 공식 서사를 부여하고, 더 나아가 헌법 전문에까지 수록하자는 주장도 이어진다. 

 

그러나 정작 그날의 전모를 둘러싼 논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공개된 미국 중앙정보국 비밀문서, 해외 보수 성향 연구기관의 분석, 북한 개입 가능성을 추정하게 하는 일부 증언들은 기존의 국가 서사와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물론 모든 주장이 사실일 수는 없다. 터무니없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사회라면 그 판단은 검증과 반론으로 가려야지, 특별한 법으로 질문 자체를 눌러서는 안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냉전 시대 소련의 붕괴를 이끌었던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세 마리 개’ 풍자가 떠오른다. 

 

가장 서늘한 대목은 러시아 개가 “짖는다는 게 뭐지?”라고 되묻는 장면이다. 먹을 것이 없는 사회도 비극이지만, 말할 자유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회는 더 무서운 사회다. 

 

표현의 자유는 천부인권이다. 그 천부인권이 법이라는 이름으로 제약받기 시작한다면, 그 사회는 이미 정상적인 자유민주사회라고 보기 어렵다. 

 

역사에 대해 다른 질문을 던지는 일, 국가가 정한 기억의 틀을 다시 묻는 일, 기존 설명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의문을 제기하는 일까지 죄악시된다면 그 나라는 ‘자유를 지키는 나라’가 아니라 ‘자유를 관리하는 나라’다.

 

2020년 이후 본격화한 부정선거 논란도 마찬가지다. 

 

4·15 총선을 계기로 시작된 의혹은 단순한 선거법 위반 차원을 넘어섰다. 선거가 끝날 때마다 당선자와 후보자들이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일부는 유죄 판결을 받는다. 

 

그러나 최근의 부정선거 논란은 그런 사후 처벌의 문제가 아니다. 전자개표기 도입을 둘러싼 불신, 선관위의 폐쇄적 운영, 중국 개입설, 카르텔 배후설, 선관위와 사법기관의 유착 의혹까지 여러 주장이 겹겹이 쌓이면서 체제 신뢰의 문제로 번졌다. 

 

사실 여부는 각각 따져야 한다. 그러나 의혹이 이토록 장기화됐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한국 사회의 신뢰 기반이 깊게 무너졌음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제도권의 태도는 놀라울 만큼 오만했다. 

 

의혹이 제기되면 투명하게 검증하고, 검증 결과로 불신을 해소하면 될 일이었다. 수개표 확대든, 절차 공개 강화든, 감시 범위 확대든, 방법은 있었다. 그러나 선관위는 논란을 줄이는 대신 논란을 키웠다. 

 

검증 요구를 흡수하지 못했고, 반대편을 설득하지 못했고, 오히려 의심하는 쪽을 비정상으로 몰아붙이는 데 익숙했다. 그 결과는 간단하다. 의혹은 사라지지 않았고 불신은 더 커졌다. 일을 이 지경까지 키운 선관위가 비난받아야 하는 이유다.

 

5·18과 부정선거는 전혀 다른 사안이다. 하나는 현대사의 비극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 진행형의 제도 불신이다. 

 

그러나 두 사안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다. 

 

국가가 진실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다. 국가는 진실의 심판자가 아니라 검증의 심판대가 돼야 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거꾸로 가고 있다. 어떤 기억은 성역이 되고, 어떤 의문은 금기가 된다. 어떤 질문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보호받고, 어떤 질문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처벌받는다. 이것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자기모순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의혹이 없는 체제가 아니다. 의혹을 말할 수 있는 체제다.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체제이고, 검증을 요구할 수 있는 체제이며, 잘못된 주장이라면 공개된 사실과 절차로 바로잡을 수 있는 체제다. 

 

역사를 둘러싼 질문도 그래야 하고, 선거를 둘러싼 검증도 그래야 한다. 질문을 없애서 질서를 세우겠다는 발상은 민주주의의 발상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 오만함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편한 방식일 뿐이다.

 

국가가 정한 진실이 언제나 진실일 수는 없다. 

 

진실은 법조문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질문과 반론과 검증을 견딘 뒤에야 비로소 권위를 얻는다. 5·18을 둘러싼 기억도, 부정선거를 둘러싼 의혹도 마찬가지다. 

 

질문을 막는 국가는 진실을 지키는 국가가 아니다. 진실을 독점하려는 국가다. 독재이자 전체주의 발현의 시그널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진짜 기준은 국가가 무엇을 옳다고 선포하느냐가 아니다. 시민이 어디까지 질문할 수 있느냐다. 

 

역사에 대한 질문을 막고, 선거에 대한 검증을 막고, 표현의 자유를 법의 이름으로 길들이기 시작한다면 그 나라는 민주주의를 말할 수는 있어도 자유민주주의를 말할 자격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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