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인혁당 사건 선고공판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은 좌파 운동권이 훗날 가장 즐겨 사용한 정치 자산 가운데 하나다. 그들은 이 사건을 “민주화 세력 대 독재 권력”의 구도로만 설명해 왔다. 그러나 사료와 숫자를 놓고 보면, 이 사건은 좌파가 말하듯 순수한 민주화 운동의 박해사만은 아니었다.
좌파는 운동권 내 반체제 급진 노선 인정해야
1974년 4월3일, 박정희 정부는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 4호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곧 민청학련 관련 활동을 금지했고,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수색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하도록 했다. 처벌 조항도 강했다. 사형, 무기징역, 5년 이상의 유기징역까지 가능했다.
당시 정부가 이 사안을 얼마나 중대하게 보았는지는 숫자로 확인된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중앙정보부는 1024명을 조사했고, 그중 180명을 비상군법회의에 회부했다.
2018년 국가기록원이 이관 받은 관련 기록물은 총 105권이었다. 기소 대상자 약 140명 기록이 98권, 불기소 대상자 42명 기록이 7권이었다. 기록 안에는 구속영장, 공소장, 공판조서, 수사보고, 진술조서, 피의자 신문조서, 증거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좌파는 이 숫자를 주로 “탄압의 규모”로만 읽는다. 그러나 보수 우파의 시선은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국가가 왜 이 정도 규모로 움직였는가를 함께 봐야 한다.
당시 정부 발표의 핵심은 민청학련이 단순 학생시위 조직이 아니라 인혁당 재건위, 재일 조총련계,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와 맞물려 움직였다는 판단이었다. 1974년 4월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민청학련의 배후에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조직이 있다고 발표했다.
물론 훗날 재심과 과거사 조사를 통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조작성이 크게 인정되었다. 이 대목은 팩트다. 그러나 좌파가 이 사실 하나로 1970년대 급진 학생운동 전체를 “순수 민주화”로 세탁하는 것은 또 다른 왜곡이다.
재판의 문제, 수사의 문제, 고문의 문제와 별개로, 당시 운동권 내부에 반체제 급진 노선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민청학련 관련 자료에서도 1974년 2월 서울대·경북대 학생들이 대구 달성군 강창 나루터에서 만나 전국 동시 시위 준비를 논의했고, 서울·중부, 영남, 호남 권역을 나누어 연락망을 만들기로 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좌파는 늘 “조작”만 말한다. 그러나 조직적 시위 기획, 전국 연락망, 반유신 투쟁의 정치화, 재야·학생·종교계의 결합은 실제로 존재했다. 정부 수사의 과잉과 별개로, 당시 학생운동이 단순한 학내 불만 표출을 넘어 정권 퇴진 운동으로 확대되고 있었던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피해자 서사 뒤에 숨은 반대한민국
문제는 그 이후다. 좌파 운동권은 민청학련 사건을 “노선 검증”의 계기가 아니라 “도덕 면허증”으로 만들었다. 감옥에 갔다. 수배되었다. 재판받았다. 그러므로 옳았다. 이 공식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탄압받았다는 사실이 노선의 정당성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독재와 싸웠다고 해서 자유민주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반정부 운동을 했다고 해서 대한민국 헌정 체제를 존중한 것도 아니다. 실제로 이후 1980년대 운동권의 상당수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민족해방론, 반미주의, 친북적 세계관으로 기울었다.
민청학련 사건은 바로 그 기억의 창고가 되었다. 1974년의 수사와 재판은 좌파에게 “우리는 피해자였다”는 서사를 제공했다. 그들은 이 서사 속에 자기들의 급진 노선, 반대한민국 정서, 북한에 대한 침묵,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함께 숨겼다.
우파는 이 사건을 다르게 읽어야 한다. 박정희 정부의 모든 조치가 완전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은 북한과 대치하던 분단국가였다. 1968년 1·21 청와대 기습 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푸에블로호 사건 이후 안보 위협은 추상이 아니었다.
기록, 숫자, 조직, 노선, 결과 없이 눈물만 강조
1970년대 초반 남베트남 붕괴가 가까워지고 있었고, 한반도에서도 체제 경쟁은 생존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학생운동과 좌파 혁명 노선의 결합을 위험하게 본 것은 이해 가능한 안보 판단이었다.
좌파는 이 맥락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자신들의 노선 실패를 모두 “탄압의 역사”로 통합했다. 그 결과 민청학련은 역사 사건이 아니라 정치 신화가 되었다. 수사 기록 105권, 조사 대상 1,024명, 군법회의 회부 180명이라는 구체적 숫자는 사라지고, “민주화 투사”라는 상징만 남았다.
그 상징은 이후 한국 좌파의 방패가 되었다. 북한 문제를 물으면 민주화 경력을 내세웠다. 반미주의를 비판하면 독재에 맞섰다고 답했다. 대한민국 정통성을 흔드는 발언을 지적하면 감옥에 갔다 온 세대라고 했다. 이렇게 민청학련의 기억은 좌파의 자기 검열 회피 장치가 되었다.
역사는 피해자의 눈물만으로 쓰면 안 된다. 기록, 숫자, 조직, 노선, 결과를 함께 보아야 한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은 좌파가 말하듯 순백의 민주화 사건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유신체제에 맞선 학생운동이면서 동시에 이후 좌파가 자기 급진 노선을 민주화 신화로 포장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보수 우파가 해야 할 일은 탄압 논쟁에 끌려가 방어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그들은 무엇을 꿈꾸었는가? 그들의 노선은 자유민주주의였는가? 그들의 기억은 왜 늘 북한 문제 앞에서 침묵했는가?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민청학련 사건은 더 이상 좌파의 성역이 아니다. 그것은 1970년대 운동권이 실패한 노선을 “탄압의 역사”로 덮어버린 대표적 사례로 다시 읽히게 된다.

◆ 松山(송산)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펴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