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사관학교와 공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서울시청 앞에서 5·16혁명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61년 5월16일, 5·16 군사정변이 발생했다.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사 세력은 새벽 시간대 서울 주요 거점을 장악했고, 방송을 통해 정권 장악을 선언했다.
당시 대통령은 윤보선, 총리는 장면이었다. 4·19 이후 출범한 제2공화국은 이미 정치적 분열과 행정 마비 상태에 가까웠고, 1960년 한 해 동안만 2000건이 넘는 시위가 발생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일부 세력은 이 상황에서 등장한 군사정권을 체제 전환으로 보지 않았다. “군부의 일시적 개입” “곧 붕괴될 반동적 과도기”라는 평가가 반복됐다. 이 판단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역사 해석 틀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혁명 이후에는 반드시 반동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도식이었다.
실패한 정세 판단과 반동이라는 도식의 함정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쿠데타 직후 설치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단순한 임시 기구가 아니었다. 1961년 6월 중앙정보부가 창설됐고, 초대 부장은 김종필이었다.
같은 해 8월에는 정치활동정화법이 시행되어 4000명이 넘는 정치인이 활동 금지 처분을 받았다. 이는 단순한 질서 회복 조치가 아니라, 정치 구조 자체를 재편하는 작업이었다.
경제 정책에서도 변화는 즉각 나타났다. 1962년 1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됐다. 목표는 공업화와 수출 확대였다. 1961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약 82달러 수준이었다. 농업 비중이 절대적이었고, 산업 기반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수출은 급격히 증가한다. 1964년 1억 달러 수준이던 수출액은 1968년 5억 달러를 넘어선다. 단순한 숫자 변화가 아니라 경제 구조 자체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이미 “일시적 반동”이라는 규정은 현실과 맞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일부 세력은 이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 해석을 유지하기 위해 현실을 무시하거나 축소했다. 경제 성장 역시 “외부 의존의 결과”나 “일시적 현상”으로 평가절하됐다.
이 판단의 배경에는 명확한 특징이 있다. 현실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이념에 맞춰 재단하는 태도다. 군사정권은 반동이어야 했고, 따라서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결론이 먼저 내려졌다. 이후의 모든 사실은 이 결론을 유지하기 위한 보조 자료로 사용됐다.
문제는 이 오판이 전략 부재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곧 무너질 체제를 상대로 장기 전략을 세울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조직화도, 대중 기반 구축도, 정책 대응도 모두 지연됐다. 기다리면 상황이 바뀐다는 막연한 기대가 자리 잡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였다.
현실 외면이 부른 전략적 파산
1963년 10월, 대통령선거가 실시됐고 박정희가 당선되면서 민정 이양이 이루어졌다. 형식상 군정은 종료됐지만, 권력 구조는 그대로 유지됐다. 이어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재선에 성공하며 체제는 더욱 안정화됐다. 이미 이 시점에서 “일시적”이라는 표현은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판단은 쉽게 수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과의 간극이 커질수록 내부 논리만 강화됐다. 군사정권의 지속은 예외적 상황으로 설명됐고, 여전히 본질적으로는 붕괴할 체제라는 주장이 반복됐다.
이 태도는 단순한 인식 오류를 넘어선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그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거나 축소하는 방식이다. 특히 북한 체제에 대한 평가와 연결될 때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1960년대 북한은 이미 김일성 중심의 권력 체제를 확립하고 있었다. 1956년 8월 종파 사건 이후 반대 세력은 숙청됐고, 1967년에는 유일사상 체계가 강화됐다. 정치적 다양성은 존재하지 않았고, 권력은 철저히 집중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세력은 북한을 “진보적 체제”로 인식하거나 최소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대한민국의 군사정권은 “반동”으로 규정했다. 현실의 작동 방식이 아니라, 이념적 분류가 판단의 기준이 된 것이다.
이 이중 기준은 결국 현실 인식을 더욱 왜곡시켰다. 한쪽은 실제 구조와 무관하게 긍정적으로 해석되고, 다른 한쪽은 실제 성과와 무관하게 부정적으로 해석됐다. 이 상태에서는 어떤 분석도 정확해질 수 없다.
1960년대 후반 대한민국은 분명히 변화하고 있었다. 산업화가 시작됐고, 수출 중심 경제 구조가 형성됐으며, 국가 운영 방식도 이전과 달라졌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다. 초기의 규정을 유지하기 위해 현실은 계속해서 무시됐다.
결국 이 시기의 핵심 문제는 하나다. 현실보다 이념이 앞섰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반복적인 판단 실패였다. 상황을 읽지 못했고, 변화의 방향을 놓쳤으며, 대응은 항상 늦었다.
1961년 이후의 이 시기는 단순한 정치 변동의 시기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실패 사례다. 이미 정해진 결론을 가지고 현실을 바라보면, 어떤 변화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
사상이 현실을 설명하지 못할 때, 그 사상은 분석 도구가 아니라 오판의 원인이 된다. 그리고 그 오판은 단발로 끝나지 않는다. 이후 수년, 수십 년 동안 이어지는 판단의 방향을 규정한다.
1961년의 오독은 그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길게 이어졌다.

◆ 松山(송산)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신화가 된 조선’과 ‘다다미 위의 인문학’을 펴냈다. 현재 자유주의 문화운동의 연구와 실천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