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이상로 기자 “특검 진정성, ‘올공 검증단’ 수용에 달렸다”
MBC 카메라출동에서 활약한 이상로 기자가 향후 특별검사의 진정성을 가름할 핵심 척도로 '올바른 선거를 위한 공정검증단(올공 검증단)'의 검증 현장 참여 수용 여부를 제시했다. 이 기자는 지난 15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2-2 게이트 앞에 마련된 부정선거투쟁국민연합(부투연·공동상임대표 장재언·김병준) 특설무대 현장 연설에서 “특검이 구성되더라도 시민단체 중심의 검증단이 현장에 직접 들어가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며 “검증단 참여를 거부하는 특검은 진정성을 의심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패망 후 조선을 떠나는 일본인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대규모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흔히 여기서 이야기가 끝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귀환하지 않으려 했거나, 귀환하지 못하고 한국에 장기간 남은 일본인도 있었다.
그 이유도 한 가지가 아니었다. 패전 직후에는 사업과 재산이 중요했고, 대규모 송환이 끝난 뒤에는 결혼과 가족이 더 큰 이유가 됐다.
1944년 조선 거주 일본인은 약 70만 명을 넘었다. 군인과 전쟁 말기의 이동 인구까지 포함한 수치다. 패전 직후 조선군관구 자료에서는 한반도의 일본인을 약 85만 명으로 파악하기도 했다.
일본 측도 처음부터 이들을 모두 내지로 철수시키는 방안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패전 직후 한때 일본인의 잔류·정착(残留·定着) 가능성을 검토했고, 약 50만 명을 귀환시킬 필요가 있다는 판단도 나왔다. 이것은 나머지 35만 명이 잔류를 희망했다는 뜻은 아니지만, 전원 철수가 처음부터 유일한 선택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병합 이후 35년이 지났고 개항기부터 조선에 들어와 살던 일본인도 있었다. 1945년에는 조선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얻은 일본인 2세도 상당했다.
경성·부산·인천·군산·목포·대구 등에는 일본인 상권과 주거지가 형성돼 있었고 공장·상점·회사·농장·병원·여관 등을 운영하면서 토지와 주택을 가진 사람도 많았다. 이들에게 일본은 모국이었지만 실제 생활의 터전은 조선이었다.
따라서 귀환은 여행가방을 들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정도의 일이 아니었다. 사업체와 직장, 집과 재산을 포기해야 했다. 반면 패전한 일본은 공습 피해와 식량·주택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고 해외에서 수백만 명의 일본인이 돌아오고 있었다. 경성일본인세화회(京城日本人世話会) 같은 조직이 일본인의 재산 보호와 귀환 문제를 함께 다룬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한을 점령한 미군정의 정책은 달랐다. 1945년 가을부터 일본인의 계획적인 송환이 진행됐고 부산이 주요 귀환항이 됐다. 1946년 초에는 남한 일본인의 대규모 송환이 거의 마무리됐다. 특별히 필요하다고 인정된 사람을 제외하면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원칙이 적용됐고, 일본인이 소유했던 기업·토지·건물도 미군정의 관리와 귀속재산 처리 대상이 됐다.
여기서 남고 싶었던 일본인과 실제로 남은 일본인을 구별해야 한다. 1945년 직후에는 회사·상점·토지·주택 등 경제적 기반 때문에 잔류하려는 사람이 있었지만 미군정의 정책으로 선택지가 사라졌다. 반면 송환이 끝난 뒤에도 한국에 남은 사람들에게서는 전혀 다른 이유가 나타난다. 한국인 배우자와 자녀였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일본 후생성 자료다. 1969년 4월11일 후생성이 각 도도부현 등에 보낸 「在韓邦人の帰国に伴う援護について」, 즉 「재한 일본인의 귀국에 따른 원호에 대하여」에는 당시 한국에 남아 있던 일본인의 모습이 나온다.
후생성은 전전 또는 종전 직후 한국으로 건너가 한국인과 혼인하는 등의 사정으로 현지에 머물게 된 일본인이 상당수 존재하며, 대부분이 부녀자(婦女子)라고 파악했다.
이들은 크게 두 종류였다. 식민지 기간 조선에서 살다가 한국인 남성과 결혼해 패전 후에도 남은 여성들이 있었고, 일본에서 한국인과 결혼한 뒤 해방 후 남편을 따라 한국으로 건너온 여성들도 있었다. 후자의 대표적인 인물이 구니타 후사코(國田房子)다. 그녀는 1945년 한국인 남편과 네 자녀를 데리고 부산으로 와서 생활했고, 같은 처지의 일본 여성들을 돕는 부용회(芙蓉会) 활동을 이끌었다.

부용회 사무실(위)과 부용회 행사 [부용회 후원회 제공]
그 규모는 생각보다 컸다. 주부산 일본국총영사관 자료에 따르면 부산지역 부용회 회원은 한때 700명을 넘어섰다. 전국 숫자가 아니라 부산지역 회원만 그렇다. 1991년 5월 작성된 부용회 명부를 이용한 연구에서도 서울본부 관할 회원 484명이 확인된다.
다른 시기의 조사에서는 서울 363명, 부산 253명이라는 숫자도 나온다. 조사 연도와 집계 방식이 서로 달라 합산할 수는 없지만, 한국인과 결혼해 한국에 남은 일본 여성이 몇십 명 정도의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이들을 한국에 붙잡아 둔 가장 강한 끈은 자녀였다. 일본 여성 혼자라면 귀국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한국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문제는 달라졌다. 아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하고 한국 학교를 다녔다. 어머니가 일본으로 돌아가려면 남편과 자녀를 두고 떠나거나 가족 전체가 새로운 생활기반을 찾아야 했다.
한국전쟁은 사정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남편이 사망하거나 실종되기도 했고 가족관계를 증명할 서류가 사라진 경우도 있었다. 세월이 지나 남편과 사별하거나 이혼하면서 일본 귀국을 희망하는 여성도 생겼지만, 이번에는 경제적인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후생성은 귀국을 원하면서도 자력(資力)이 없어 돌아가지 못하고 생활고를 겪는 사람이 있다고 기록했다.
그래서 일본 정부의 지원은 배삯을 마련해 주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귀국 후 주거와 취업, 생활보호, 모자복지와 아동복지까지 지방정부가 담당하도록 했다. 1960년대 일본 『후생백서』에도 한국에 잔류했던 일본인 부녀자의 귀국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1946년 집단 송환이 사실상 끝난 지 약 20년이 지난 뒤에도 한국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계속 존재했던 것이다. 1969년에는 이 문제가 일본 국회에서도 논의됐다.
목포 공생원의 다우치 지즈코(田内千鶴子)도 이 시대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한국인 윤치호(尹致浩)와 결혼한 그녀는 한국전쟁 중 남편이 실종된 뒤에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목포에 남아 고아들을 돌보다 1968년 세상을 떠났다. 모든 재한 일본인 여성의 삶을 대표하는 사례는 아니지만, 패전 뒤 일본인 여성에게 ‘귀국’이라는 선택이 얼마나 복잡했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패전 후 남한의 일본인 잔류는 두 시기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1945년 직후에는 사업·직장·토지·주택 등 조선에서 쌓은 경제적 기반을 포기하기 어려워 잔류하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1946년 이후에는 한국인 배우자와 자녀를 가진 일본 여성들이 장기 잔류자의 중요한 집단을 이루었다. 일본 후생성이 1960년대까지 별도의 귀국 원호정책을 시행해야 했던 것도 이들 때문이었다.
패전으로 국가는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만들어진 사람들의 생활까지 같은 날 끝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사업과 재산을 두고 갈 수 없어 남으려 했고, 어떤 사람은 남편과 자식을 두고 갈 수 없어 남았다. 1945년 8월15일 제국은 사라졌지만, 그 안에서 만들어진 삶과 가족은 국경선처럼 하루 만에 다시 그을 수 없었다.

◆ 松山(송산) 정광제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펴냈다.